▲ 권종호

지난해 필자는 특수건강진단으로 1만명 가까운 노동자를 만났다. 올해도 이미 4천500명을 넘겼다. 필자뿐만 아니라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중 특수건강진단 업무에 종사하는 경우라면 하루에 100명 이상의 노동자를 문진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가끔은 200명 가까운 인원을 하루에 보기도 한다. 200명을 보는 날은 아침 일찍부터 오후까지 거의 하루 종일 문진한다. 10~20명씩 문진을 기다리는 분들이 끊임없이 있어 화장실 가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다. 가끔 대기시간이 너무 길다는 항의를 받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무작정 문진을 간단하게만 할 수는 없다. 특수건강진단을 통해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판단하고 조언하고 관리해야 할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직업환경전문의는 문진과 건강검진 결과로 질환이나 이상증상 유무를 판단해야 하고 이러한 소견이 실제 노동자 업무와 관련이 있는지 ‘업무관련성 평가’를 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 노동자가 현재 업무전환이 필요한지, 업무전환 없이 현재 업무를 지속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필요한 조치는 무엇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업무적합성 평가’를 한다. 이는 전반적인 개인에 대한 평가 이전에 각 개인에게 노출될 수 있는 개별 유해인자를 평가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소음·분진·진동·유기용제류에 한꺼번에 노출되는 노동자를 평가하게 된다면 각각의 유해인자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이경 및 청력 검사 결과, 청진 및 폐기능 검사 결과, 진동 손상 관련한 말초신경, 혈관 평가, 유기용제류 노출 관련 신경계·조혈기계·간담도계·비뇨기계 문진을 모두 확인해야 한다. 문진 때 이런 평가까지 모두 끝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추후에 있을 평가를 위해 빠지는 부분이 없도록 확인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 질환이 있던 분이거나 이상증상을 느끼는 분들이라면 그 질환이나 증상의 현재 상태와 작업시 문제 되는 부분을 확인해야 하고 실제 작업과 관련성이 없더라도 일반적인 의학상담이나 조언을 해 줘야 한다. 특히 야간작업자에서 불면은 매우 흔하고 많이 힘들어하는 부분이기에 수면 상담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 많은 내용을 담아내기에 노동자 문진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심지어 일반건강검진도 검진의 질 하락을 막기 위해 의사 1인당 하루 100명 이내로 검진자가 제한돼 있는데 그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평가해야 하는 특수건강진단에는 1년 기준 1만명 제한만 있고 1일 기준 제한은 없다. 결국 하루 100명을 검진해도, 200명을 해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안 되는 것이고 문진의 심각한 질 하락을 가져오게 된다.

2008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산업안전보건제도개선위원회 합의서에는 "정부는 작업환경측정과 근로자 특수건강진단 결과의 신뢰성이 제고될 수 있도록 기존 제도 활성화와 함께 진단기관 평가 후 공표제 등 제도를 점진적으로 개선·보완해 나간다"는 내용이 명시됐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현실에서 특수건강진단의 변화는 크게 찾아볼 수 없다. 합의를 통해 변화된 내용은 특수건강진단 기관에 대한 정기적인 평가가 전반적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점 뿐이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특수건강진단이 추구하는 내용과 목적을 공유하고 전체적인 정도 관리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꼭 필요한 부분일 수 있다. 이러한 평가기준에 맞추는 과정에서 직업환경전문의가 병원측과 사업주를 설득하고 제대로 된 특수건강진단 체계를 갖추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다만 기본이 해결되지 않은 기관평가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특수건강진단 기관평가에서 요구하는 완벽한 문진을 위해 충분한 문진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100명이 넘는 인원을 오전에 순식간에 문진해 버리는 현실에서 제대로 된 문진기록이 남는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제대로 된 질 관리를 위한 기관평가라면 문진이 기록됐는지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제대로 기록할 수 있을 만한 인원만을 검진했느냐를 먼저 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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