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즐겨 봤던 소설 <수호지>는 일탈한 군상들의 중구난방이었다. 대견하게도 그들이 한결같이 주창하는 것은 '충의(忠義)'였고 '인용(仁勇)'이었다. 다양한 호걸들이 규합될 때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사해형제, 四海兄弟)라고 말했다. 누구나 바라고 누구나 꿈꾸는 세상을 만들고자 만났으니, 그 사람이 어떤 지위에서 어떤 일을 했던 간에 형제처럼 툭 터놓고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거다. 송강이 무송을 만났을 때, 노지심이 양지를 만났을 때에도 그들은 부딪히고 싸웠지만 결국엔 "세상이 모두 형제"라는 말을 나누며 부둥켜안았다. "노동". 그건 한때 거칠고 뜨거웠다. 그건 1900년대 전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였다. 어느 때에는 혁명이 됐고 어느 때에는 사회운동이 됐다. 어느덧 그건 현대인과 그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일부가 됐다.

인류 역사상 노동은 계속 존재했다. 생존과 직결되는 활동이기에 더욱 중요했다. 광활한 평원에서 곡물을 길러 내던 농노들은 지주에겐 소소한 자원에 불과했을지라도 그 노동이야말로 러시아의 젖줄이었고 밥줄이었다. 그들은 사회에서 소외됐다. 그들이 산업혁명에 따라 터전을 잃고 도시로 한데 모였을 때, 소비에트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노동혁명은 세상과 사용자들이 노동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했고 근로자를 보호하도록 만들어 줬다.

근로자는 사용자와 다르다. 근로자(노동자)와 사용자(사업주)는 법적으로 분류하기 쉽다. 누군가를 위해 일하고 돈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근로자고, 자신을 위해 영리활동을 하는 사람은 사용자다. 근로자라면 헌법과 법률에 따라 신성한 근로에 대해, 노동 3권에 대해 최대한의 예우를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2017년 대한민국에 1천800만명의 근로자와 800만명의 자영업자가 있다는데, 근로자·사용자를 나눠 근로자만을 보호해야 하는가. 어쩌면 사용자지만 중위층 이하 근로자와 다를 게 없는데도,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회보험이나 근로조건 등의 수혜를 받을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줄곧 근로자로 살다가 자영업자로 나와 보험을 팔거나 통닭을 튀기는 사람들은 어떤가. 생계불안에 시달리고 고된 노동을 하는 이들을 ‘근로자형 사용자’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근로자는 어떤가. 상당수의 근로자들이 최대한의 예우를 적절하게 받고 있는가. 전체 근로자의 절반인 사람들이 비정규직인 상황에서 노동 3권 문제나 노조탄압 문제는 참 멀다. 개별적 근로관계법이 지향하는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 향상시키는"(근로기준법 1조) 목적이 제대로 달성되고 있는지부터 확인해 봐야 하는 실정이다. 얼마나 많은 근로자들이 임금체불·감정노동·직장내 괴롭힘·근로시간 위반, 부당해고와 전직·전보, 산업안전 미준수, 산업재해 은폐로 힘들어하는지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 대한민국에서 근로자·사용자·정규직·비정규직 등의 구분은 어쩌면 대단히 구시대적이고 이분법적이다. 정작 이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 대다수로서 같은 시대에서 동등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혼란스럽다. 누구는 '최저임금 1만원'을 주장하고 누구는 '영세 자영업의 몰락'을 호소한다. 누구는 '노조탄압'이나 '노동 3권'을 말하고 누구는 '과보호 노동권'이나 '노동정치화'를 주장한다. 그런데 정작 아무도 세상이 형제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사해형제라는 생각을 하면 누구나 이웃의 현실을 먼저 들여다볼 것이고 같이 공감을 나눌 수 있을 게다. 근로자든 사용자든 누구나 바라는 바는 같다. 그건 행복한 일터, 건강한 노동을 위한 세상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며 비슷한 고민을 하는 누구나 '사해형제'라는 생각으로 큰 연대(Solidarite)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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