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김영삼 정권은 청와대 직속으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만들어 법외단체였던 민주노총을 참여시켰다. 자본과 관료들은 변형근로시간제, 정리해고제, 파견제, 파업요건 강화, 무노동 무임금, 노조전임자 임금금지를 메뉴판에 올려놓고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관철시키는 장으로 만들려 했다. 노동운동은 당연히 노동자 권익을 개선하는 쪽으로 노동법 개혁의 물꼬를 트려 했다. 노개위 논의를 깡그리 무시한 내용의 노동법을 여당이던 신한국당이 날치기했고, 노개위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가 도래하고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신정부는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사회적 합의체 도출, 사회안전망 구축’을 내세웠고, 98년 1월 민주노총도 참여한 노사정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어진 2월 정리해고와 파견노동 법제화와 전교조 인정 등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화를 맞바꾼 합의가 이뤄졌다. 민주노총은 격렬한 내홍을 겪었고, 노사정위에 불참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20년이 지난 지금, 김영삼의 노개위와 김대중의 노사정위에 민주노총이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대중운동으로서의 노동조합은 노동자 권리 개선을 위해 동원화(mobilization)와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전술을 적절히 구사해야 한다. 노개위·노사정위 불참은 제도화 전술을 거부하고, 동원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반짝 경험에 불과했지만 노개위와 노사정위 참여 없이 조합원을 마냥 동원하는 경직된 전술만 취했더라면 민주노총의 정치적 영향력과 사회적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초라해졌을 것이다.

20년 전 민주노총이 노개위·노사정위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당시 알량하나마 사회적 대화의 경험을 쌓아 두지 않았더라면, 민주노총 내에서 과대대표(over-representation)되고 있는 정파들의 ‘신앙’과는 달리 민주노총에 소속된 대형 사업장들은 지금보다 더욱 ‘어용화·귀족화’됐을 것이다. 민주노총 안에서 사회적 대화를 가장 강력하게 거부해 온 정파가 지도부를 장악한 대형 사업장들에서 채용비리가 발생하고 비정규직이 노조 현장단위 밖으로 축출되는 현실은 이러한 분석을 방증한다.

동원화와 제도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동원화 없는 제도화 없고, 제도화 없는 동원화 없다. 조합원을 동원한 결과가 제도화라는 열매로 이어지지 못하고, 조합원이 동원의 대상으로만 전락할 때 동원화 전술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지난 20년 동안 목격한 밑도 끝도 없는 ‘총파업’이 그런 것이다. 총파업을 행하는 주체도 총파업을 당하는 객체(자본과 국가)도 총파업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동조합운동이 보유한 최후의 무기인 총파업이 형해화·희화화된 데 대해 책임을 지는 이는 아무도 없다.

동원화가 뒷받침하지 못하는 제도화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정권들이 ‘사회적 대화’에 민주노총을 참여시키고자 했던 데에는 민주노총의 동원력이 주된 이유로 작용했다. 그런데 지난 20년 동안 동원력은 현실태에서 가능태로 하락했고, 이제 사람들은 민주노총의 동원력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동원력의 상실은 자연스럽게 제도화의 악화로 이어져 왔다.

문재인 정권은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일자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일자리 정책의 방향 설정과 계획 수립, 관련 정책의 발굴과 조정, 고용 및 노동조건 격차 해소를 위한 법·제도 개선이 주된 기능이다. 민주노총이 ‘노정교섭’ 자리에서 마주 앉기를 원하는 기획재정부 장관, 교육부 장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행정자치부 장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 고용노동부 장관, 여성가족부 장관, 국무조정실장,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및 중소기업청장 등 핵심 장관들이 위원으로 참여한다.

그 구성에서 일자리위원회는 사회적 대화기구라기보다는 일자리 정책을 심의·조정하는 정부기구 성격이 크다. 하지만 그 방식은 관료들만의 일방적 결정이 아닌 사용자와 노동자 대표를 참여시키는 사회적 대화의 형태를 띤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면, 일자리 정책을 논의하는 국무회의 자리에 노동자 대표가 정식 위원으로 끼는 방식이다.

노동계는 왜 3명밖에 없냐고 볼멘소리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정치적으로 볼 때, 박근혜 정권 국무회의에서 서울시장이 차지하는 이상의 위상은 보장해 줬기 때문이다. 박원순 시장이 자신은 1표뿐이고, 박근혜의 장관들이 다수결로 밀어붙인 결정에 들러리를 서 줄 수 없으니, 국무회의에 불참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면 누가 가장 좋아했을까. 그러한 어리석은 불참 결정으로부터 누가 가장 큰 혜택을 봤을까.

20년 동안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를 거부함으로써 가장 혜택을 봤던 세력은 자본과 관료였으며, 가장 큰 피해를 봤던 세력은 10% 조직노동을 넘어 90% 미조직 대중이었다. 문제는 3명뿐이라는 ‘양’이 아니라 그 3명의 ‘질’이다. 진검승부에서 질이 담보되지 않는 양은 의미가 없다. 일자리위원회의 구성과 기능을 볼 때 능력 없고 경험 부족한 30명보다 출중한 3명이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 한국 노동운동은 촛불혁명이 당선시킨 대통령 앞에서 열 명도 넘는 장관들과 한 수 겨룰 의지와 능력을 가진 ‘삼총사’를 만들어 놓았는가.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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