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지난 27일 좀처럼 보기 드문 집회가 있었다.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에서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 600여명이 현재 구속 중인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상대로 교섭에 나서라고 요구하는 집회를 연 것이다. 장소나 형식도 참신했지만, 무엇보다 집회 요구였던 “180만 노동자의 사용자 이재용에 대한 교섭권 쟁취”가 참으로 놀라웠다(참고로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은 모두 간접고용 노동자들이다).

지회 주장은 이렇다.

첫째, 노조할 권리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이다. 둘째, 노조할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려면 실제 권한이 있는 상대와 교섭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형식상으로는 협력사 종사자지만 임금·작업과정·고객평가 등 노동과정 전 부분에 걸쳐 결정권이 있는 것은 삼성전자서비스 원청이다.

넷째, 따라서 원청과 교섭해야 하는데 무노조를 철칙으로 삼은 삼성에서는 이재용의 허락 없이는 노사관계 변화가 불가능하다. 다섯째, 이런 식으로 이재용의 결정권에 묶여 있는 노동자가 180만명에 이른다. 여섯째, 임금과 고용 문제는 헌법적 권리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해결할 수 있다. 일곱째, 그나마 상대적으로 투쟁할 준비가 돼 있는 지회가 180만 노동자들을 대표해 사용자 이재용과 직접 교섭하겠다.

이런 식의 요구는 비정규직노조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비정규직노조들은 정부를 상대로 불법파견을 법대로 해결하라고 요구하거나, 사용자를 상대로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하라고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가 ‘비정상적’인 만큼 비정상의 정상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정상이 정상화되는 것은 보통 집단적 싸움을 통해 개별적 고용관계(근로계약관계)를 바꾸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조직 측면에서 보면 이런 요구와 실현 경로에는 딜레마가 있다. 집단적 싸움까지는 노조 힘이 강화되지만 요구가 쟁취된 뒤에는 비정상적 상태에서 만들어진 비정규직노조는 존재 기반 자체가 약화돼 버리기 때문이다. 노조 투쟁이 사회적 연대와 지지를 받지만, 정규직화가 사업장에서 이뤄지면 투쟁한 주체와 의제가 빠르게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이와는 조금 다른 요구와 경로를 선택했다. 노조할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면 고용·임금의 실제 결정권자와 교섭할 수 있고, 또 노조가 힘을 갖춘 만큼 교섭에서 임금과 고용을 해결할 수 있다면 고용형태나 임금형태는 순리에 따라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노조 단체협약이라는 집단적 노사관계를 가장 가시적이고 확실한 ‘제도’로 만들어 고용·임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이다.

지회의 이런 전략은 두 가지 점에서 큰 강점이 있어 보인다.

첫째, 현실성이다. 현대 경제의 일자리들은 획일적으로 고용과 임금 기준을 정하기 힘든 다양성이 존재하며 삼성전자서비스 수리노동자 역시 수리 품종·지역, 내·외근 근무형태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일한다. 다양한 근무 형태를 가진 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을 정규·비정규직, 직접·간접고용 같이 획일적 기준에 따라 안정화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고용과 임금의 안정화는 현장 요구를 노조가 충분하게 수렴해 단체협약·보충협약 등으로 제도화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다. 따지자면 노조가 상향식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정규직화’로만 포괄하기 어려운 현대 경제의 다양한 일자리 형태를 노조할 권리로 포괄하는 것은 노동자의 고용과 임금을 개선하는 현실적 선택이다.

둘째, 보편성이다. 우리나라 노조운동의 가장 큰 제약은 기업별 조직형태와 관계가 깊다. 어떤 문제에 대해 함께 싸우다가도 막상 해결은 제각각 사업장별로 봐야 하니, 노조 요구가 노동자 모두의 문제로 인식되기 어렵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내세운 “180만 노동자의 사용자 이재용과 교섭할 권리”는 이런 점에서 기업별 조직형태를 교섭 요구로 극복해 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지회 요구는 기업 형태가 무엇이든, 고용형태가 무엇이든 이재용의 경영 결정으로 영향을 받는 모든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해결책을 찾자는 제안이다.

지회가 규정한 180만 노동자는 삼성그룹 노동자만이 아니라 그룹 내 간접고용 노동자와 공급사슬에서 직접적 영향을 받는 모든 노동자를 포괄한다. 지회의 이번 요구는 노조가 기업별 종사자들의 조직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조직으로서 노사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겠다는 포부이기도 하다.

필자는 문재인 정부가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이런 시도에 적극적으로 화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일 뉴스를 통해 보도되고 있듯 정부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임금체계와 자회사 고용, 기존 정규직의 반발, 민간부문 개입력의 한계, 비정규직 여부의 모호성 등 여러 문제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회가 추구하는 “사용자성 확대와 노조할 권리를 통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이런 쟁점을 실용적 판단이 아닌 헌법적 권리에 입각해서, 그리고 임시방편이 아닌 노사 간 교섭을 통한 실질적 정책으로 해결한다는 장점이 있다. 더군다나 삼성에서 이를 실현하는 것은 재벌개혁의 실질적 조치이자, 노조할 권리의 낙수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재벌개혁과 비정규직 해결, 그리고 헌법적 권리 보장을 요구했던 지난겨울의 뜨거운 촛불을 우리 모두 기억하고 있다. 지금 그 요구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다. 지회는 이재용과 직접교섭 요구를 알려 내기 위해 12일부터 전국에서 매주 30명이 9월 정기국회 종료 때까지 상경해 (가칭)재벌개혁단 실천활동을 하겠다고 예고했다. 시민들의 많은 지지를 부탁한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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