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138명으로 시작해 2년 만에 22명이 남은 경북 구미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가 책 <들꽃, 공단에 피다>(한티재·사진)를 냈다. 글 쓰라면 죽기보다 싫어했던 22명이 빠짐없이 자기 삶을 꾸역꾸역 털어놨다.

나고 자란 곳을 밝힌 17명 중 12명이 대구·경북에 태를 묻었다. 나머지 5명도 부산·경남 출신이었다. 딱 한 명만 강원도가 고향이라 했다. 구미를 연고로 30~50년씩 살아온 이들은 대부분 대구·경북 여러 공장의 하청노동을 전전했다. 하청업체는 일감 있을 때 반짝 재미를 보다가 이내 폐업을 반복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식당·건설·자영업을 하다가 경기가 어려워 월급쟁이 공장노동자가 됐다. 이것저것 손을 댔지만 풀리지 않았다.

딱 한 사람 조남달 조합원은 남달랐다. 어머니 미용실을 청소하면서 자란 남달씨는 22년간 이발업에 종사했다. 그런 남달씨조차 구미 코오롱과 한국전기초자 사내 이발소에서 일했으니 22명의 삶은 구미공단과 모질게도 연결돼 있다. 남달씨는 이발소도 개업했고, 사우나에 세 들어 이발도 했지만, 사우나가 폐업하면서 돈만 날렸다.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 받고 싶어 아사히글라스 하청에 입사했지만 현장은 엉망이었다.

초 단위로 생산량을 옥죄는 아사히글라스는 20분인 점심시간에 밥 먹고, 담배 피고, 커피 마시고, 똥도 싸야 했다. 회사는 5분 걸리는 식당까지 걸어가는 게 아까워 하청노동자에게 2천500원짜리 싸구려 도시락을 먹였다. 유리 가루를 마시며 관리자들 막말을 버티고 받은 돈은 딱 최저임금이었다. 오죽했으면 차헌호 지회장도 노조 만들기 전에 공장 일 마치면 대리운전으로 생계비를 벌충했다.

 

남달씨는 자기 방식대로 연대한다. 갑을오토텍에 ‘이발연대’ 하러 가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 종일 노조원들 머리를 깎았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은 좀 색다르다. 구미공단에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공단 내 노동조건이 열악하기로 소문 난 공장을 골라 집중선전전을 한다. 하루는 아바텍, 하루는 도래이새한 공장 앞이다. 결실도 맺었다. 지난해 11월엔 일본계 회사로 연매출 1조원이 넘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 500명짜리 노조를 만들었다. 지회가 집중 선전전을 한 곳이다.

22명이 노조에 가입한 사정은 제각각이다. 김정태 조합원의 사연이 제일 기가 막히다. “하루는 (차)헌호 형이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인데 가 보면 새 세상을 볼 것”이라고 꾀어 따라 나섰다. 정태씨는 어디 좋은 술집인 줄 알고 따라갔다. KEC 천막농성장이었다.

조합원들 글은 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절절하다. 어린이집 교사인 박성철 조합원 아내는 어린이집을 마치고 한의원에서 투잡을 뛰고 밤 9시에 귀가한다. 성철씨는 그런 아내가 “투쟁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않아 고맙다.

허상원 지회 조직부장은 아내에게 조직부장 맡은 걸 말도 못했다. 아내가 집회에 와서 남편 이름표를 보고 내쉰 긴 한숨을 잊을 수 없다. 한상기 조합원은 아내와 10살·5살·3살 세 아이까지 다섯 식구가 월 100만원에 조합비 3만원 떼고 97만원으로 산다. 아내는 아이 셋 돌보며 최근 식당일까지 시작했다. 상기씨도 새벽 3시에 일어나 우유배달을 한다.

22명은 구미에서 LG·삼성 등 재벌 하청사에서 일해 봤다. 22명은 윽박지르던 관리자들이 노조설립 직후 슬슬 노조 눈치 보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최진석 조합원은 “어딜 가도 비정규직이라 갈 곳도 없다. 여기(아사히)를 좋은 일터로 만들어 일하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22명은 공단의 아스팔트처럼 강고한 ‘비정규직 체제’를 뚫고 핀 ‘들꽃’이 돼 간다. 후원주점 티켓을 들고 ‘레즈비언 상담소’ 앞에서 “이들이 노동자 투쟁과 무슨 상관인지” 한참을 서성이던 송동주 조합원에게 성소수자단체는 기꺼이 티켓을 사 줬다. 동주씨도 이렇게 세상을 배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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