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재인 공인노무사(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동자측 대리인으로 부당해고 구제신청 사건의 화해조서를 작성하러 노동위원회 조사관실로 갔다. 최근 많이 발생하는 청소용역 노동자 고용승계 거부 사건이었다. 해고가 아니라 고용계약 자체가 없는 '고용승계 거부'였기 때문에 해고 사유·절차·양정 등과 관계없이 부당해고로 인정되기 어려운 편이었다. 그래서 부당해고 판단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일정 금액의 퇴직위로금을 지급받을 수 있는 화해를 권했다.

화해조서 작성을 마무리하고 돌아갈 무렵 용역업체 사장이 나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그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는 노동유연성이 너무 없어요. 회사에 안 맞는 사람 내보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가 노동유연성이 없는 나라라고? 과연 그게 맞는 말일까. 서울 광화문 인근 광고탑에서 27일간 단식고공농성을 하고 내려온 해고노동자들이 떠오르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지금까지 봐 왔던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노동유연성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 한번 검토해 보기로 했다.

노동유연성은 “외부 환경변화에 인적자원이 신속하고도 효율적으로 배분 또는 재배분되는 노동시장의 능력”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노동유연성은 △외부적 수량적 유연성(해고의 자유) △내부적 수량적 유연성(근로시간 조정의 자유) △외부화(파견·용역·하도급 등의 간접고용의 자유) △기능적 유연성(배치전환의 자유) △임금유연성(연봉제·성과급제 등 임금변화의 자유)으로 나뉜다. 각 요소별로 노동유연성 정도를 판단해 보도록 하자.

첫째, 해고의 자유. 충분히 보장되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2016년 통계에 따르면 기간제를 비롯한 비정규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32%다. 여기에 보험설계사·대리운전기사·학습지교사·택배기사 등 법적으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사실상 노동자에 해당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보고서(2014년)에 따르면 전체 취업자의 9%인 23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즉 전체 노동자의 41%가 비정규직이라는 말이다. 이들 비정규직은 상시적인 고용불안에 허덕이고 있으며, 사용자가 마음만 먹으면 계약기간 종료를 이유로 해고할 수 있다.

둘째, 사용자는 마음대로 근로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선택적 근로시간제 등 사용자가 수요에 따라 업무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유연근로시간제도가 법적으로 보장돼 있다. 이런 유연근로시간제도에 따라 연장근로·교대근로를 시키면서도 가산수당 지급을 최소화할 수 있다.

셋째, 사용자는 간접고용 자유도 폭넓게 보장받는다. 건설공사 현장을 제외한 대부분 업종에서 파견노동자를 사용할 수 있으며, 그나마 파견허용업종에서 제외된 제조업·건설공사현장 등은 사내·사외 하도급을 통해 같은 효과를 누리고 있다. 또한 회사가 부수적 업무로 판단하는 청소·경비·보안·주차 등 업무에는 백이면 백 간접고용을 사용한다.

넷째, 사용자는 배치전환의 자유를 넓게 보장받고 있다. 배치전환에 대해 판례는 업무상 필요한 범위 내에서 상당한 재량을 인정한다. 노동조합 조직을 무력화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을 본래 업무와 전혀 관계없는 업무로 전환시켜 자진퇴사를 유도하는 등의 방법으로 배치전환을 사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임금에서도 사용자는 연봉제·성과급제 도입 등을 통해 유연성을 넓게 확보하고 있다. 근로자 대표 동의라는 법적 절차를 무시한 채 공공기관에 일방적으로 도입된 성과연봉제만 보더라도, 노동조합이 없는 일반 사기업의 경우 해가 지나면 자연스레 올라가는 임금은 옛날 말이라는 것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이래도 우리나라의 노동유연성이 낮다고 말할 수 있나. 문득 이번 대선 TV토론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했던 발언이 떠오른다.

“비정규직·정규직 문제의 본질은 노동유연성에 있다.”

이 말은 노동유연성이 확보되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될까. 지금도 노동유연성이 너무 없다고 아우성치는 기업들에게 더 큰 노동유연성을 보장해 준다면?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노동자의 일자리는 더욱 불안해지고, 처우는 더욱 나빠질 것이다. 곧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