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새로운 세상이라도 올 것처럼 들떠 있다. 아니 이미 새로운 세상인 것처럼 난리다. 아직 보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 노동자들까지도 문재인의 나라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로서 했던 노동공약이 조만간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정말 오랜만이다. 내일은 다를 거라고 우리 노동자들이 기대하는 오늘은 정말 오랜만이다. 정말이지 나도 이 나라 노동자들의 기대가 실망이 되지 않고, 문재인이 노동자를 위한 대통령으로 한국 현대사에 기록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 세상에서 권력에 대한 흥분과 기대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노동자다. 그러니 대통령이 아닌 노동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노동자의 눈으로 자신이 어떻게 취급되는지 냉정히 돌아볼 일이다.

2. 노동자, 노동하는 인간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세상은 노동하는 인간과 노동하지 않은 자로 나뉜 채 유지돼 왔다. 세상의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제공하기 위해 노동하는 인간의 존재로 세상은 존속할 수 있었다. 세상의 생존이 보장되기 위해서라도 노동하는 인간의 생존이 보장돼야 한다. 이는 근로기준법 등 노동자 보호법제가 마련되기 이전부터, 심지어 근대 작업장체계가 도입되기 이전인 전근대의 세상에서 노동하는 인간은 노예·농노 등으로 살았던 것인데, 당시 그들에 대한 생존 보장은 물적 재생산을 통한 그 세상의 계속성을 위해서 중요한 문제였고, 그에 관한 질서가 구축됐기에 세상은 존속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세상인 오늘, 노동하는 인간인 노동자의 생존도 국가가 법·제도로서 노동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해 보장하고 있다. 임금·노동시간·고용 등에 관한 노동자 보호법제가 그것이다. 노동자권리를 위한 근대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도 노동자 보호법제는 존재했다. 19세기 초 영국의 공장법, 19세기 후반 비스마르크시대 독일 사회보장법제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노동법제에서 노동하는 인간은 보호 대상인 인간이다. 국가 권력이 노동자를 보호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있어 왔던 노동하는 인간의 생존 보장 제도가 이렇게 근대 자본의 세상에서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하는 인간으로서 노동자는 근대의 인간이 아니었다.

3. 나는 노동자를 이렇게 보호대상으로 취급되는 노동하는 인간, 계약하는 인간, 투쟁하는 인간으로 나누려고 한다. 근대의 세상은 계약으로 열렸다. 왕과 영주의 권력이 아닌 시민의 계약으로 근대가 왔다. 근대 자본주의사회는 계약 자유를 세상의 기본원칙으로 선언하고서 왔다. 근대의 작업장에서 노동하는 인간, 노동자도 계약하는 인간으로 취급됐다. 자유라는 천부인권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같은 인간인 사용자와 근로계약을 체결하고서 자유를 잃고 사용자의 명령에 복종해서 일하는 노동자로 다시 태어난다. 노동자는 계약으로 만드는 신분이었다. 근로계약은 사람을 사용자에 복종하는 노예로 만들었고, 노동자·근로자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노동조건을 사용자와의 합의로 정하는 계약하는 인간이다. 단순히 사용자와 국가권력으로부터 보호대상으로 취급되는 인간은 아닌 것이다. 임금·노동시간·고용기간 및 형태 등 노동조건은 계약하는 인간인 노동자와의 합의 없이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정할 수가 없고,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정했다면 그 효력은 인정될 수가 없다. 이것이 계약하는 인간인 노동자가 사는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는 아니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는 임금·노동시간·고용 보장 등 제반 노동조건에 관해 사용자와 자유로이 합의해 정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사용자가 마련해 놓은 근로계약서는 중요한 노동조건을 회사규정이 정한 바에 따르도록 하고, 회사규정 등 취업규칙은 사용자가 작성·변경 권한을 갖는다는 근로기준법(94조 참조)과 그에 대한 법원의 해석인 판례를 통해서 오늘 노동하는 인간인 노동자는 사용자가 정하는 바에 따르고 있다. 이처럼 도저히 계약하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을 우리의 노동법질서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노동자는 사용자의 처분에 맡겨진 노예였다. 계약하는 인간은 노예가 아니다. 노동하는 인간 중 사용자가 주는 대로 받으면서 사용자의 담장 안에서 사용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인간을 인간의 역사는 노예라고 불렀다. 뭐 근로기준법은 기존 취업규칙을 불이익하게 변경하는 경우에는 과반수노조의, 그 노조가 없으면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하긴 했다(94조1항 단서). 하지만 이건 달리 말하면, 불이익하게 변경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계약에 의해 정했어야 할 노동조건을 사용자 맘대로 정할 수 있도록 법이 보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나라 노동법은 노동자를 계약하는 인간이 아니라 사용자의 처분에 따라야 할 노예로 취급하는 것이겠다. 최근 서울중앙지법에서 무효라고 판결이 선고된 공공기관 성과연봉제는 지난해 정부 지침에 따라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규정을 개정해 도입한 것이었다. 이는 판결이 나온 주택도시보증공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박근혜 정권에서 공공기관 대부분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과연봉제를 확대 도입했던 것이니 말이다. 그나마 법으로 동의를 받아서 하도록 한 것조차도 무시하고서 한 짓이었다. 뭐라고 했더라. 노동자측의 동의 없이도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으니 무효가 아니라고 했다. 정부의 지침으로, 사용자의 주장으로, 법정에서 사용자측 대리인의 주장으로 반복해서 했던 말이었다. 대법원 판례가 그렇게 판시한 적이 있다고 이번 경우에도 그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분명히 판례가 사회통념상 합리성 운운하면서 판시한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계약하는 인간으로서 노동자를 인정하는 것까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절차에 관한 근로기준법 규정을 제대로 읽고서는 그렇게 판결해서는 안 되는, 부당한 판결이었던 것이고, 그런 판결 사례를 일반화해 성과연봉제 도입이 유효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나라는 너무도 뻔뻔했다. 노동자를 노예로 취급하면서도 너무 뻔뻔했다.

4. 그런데 오늘 노동자는 계약하는 인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투쟁하는 인간이어야 한다. 노동조건 등 자신의 권리, 노동자권리를 위해서 투쟁하는 노동자는 사용자와 권력을 상대로 요구하고 그 요구 관철을 위해 싸우는 인간이다. 반드시 단체로서 집단적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라도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노동자는 투쟁하는 인간이다. 투쟁 없이 권리 없다. 노동자에게는 ‘계약 없이 권리 없다’가 아니다. 노동자가 계약하는 인간이어서는 인간다운 생활이 보장되는 노동자권리를 확보할 수가 없다. 단순히 사용자와 협의해서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것으로는 현대의 인간인 국민에게 보장돼야 할 ‘인간다운 생활’은 보장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이 보장되는 생활을 위해서 노동자는 합의를 거부하는 사용자를 굴복시킬 수 있는 투쟁하는 인간이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투쟁하는 인간으로서 노동자의 기본권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노동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해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가진다”라고 노동기본권을 보장하고 있다(헌법 33조). 사용자를 상대로 단결해 투쟁해서 노동조건을 향상하도록, 노동자를 투쟁하는 인간이라고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나 법률과 법원의 판례는 노동자를 투쟁하는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은 온통 제한하고 금지하는 규정으로 쟁의행위에 관한 장을 채우고 있다. 법원 판례는 파업 등 단체행동을 자유가 아니라 국가가 엄격한 기준에 따라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것으로 정당성 요건을 판시해 왔다. 이에 따라 이 나라에서 노동자는 투쟁하는 인간이라고 선언됐지만 투쟁하는 인간일 수가 없는 것이다.

5. 일자리 만들기를 위해서든 뭐든 문재인은 노동자권리를 위한 공약을 밝혔고, 대통령으로서 문재인은 그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오늘 나는 믿고 있다.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노동시간단축, 비정규직 차별 해소, 최저임금 인상 등 주요 노동공약은 노동자 보호를 위해서 국가가 할 일을 말한다. 그런데 노동자를 투쟁하는 인간으로 보장하기 위한 정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노동자가 사용자에 맞서 요구하고 관철하는 투쟁할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는 노동공약은 눈에 보이지 않고, 대통령이 돼서 노동조건 향상을 하겠다는 공약만 눈에 보인다. 사실 문재인의 공약에서 노동자를 계약하는 인간으로 인정하기 위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조차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만큼 눈에 띄는 공약이 없다. 실질적으로 노동조건에 관한 합의로 노동자와 사용자 간에 근로계약이 체결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마련에 관한 공약은 없다. 노동자가 계약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부정하는 취업규칙제도에 관해 이러한 제도를 폐지하고 노동자를 계약하는 인간으로 취급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마련을 위해서 문재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서울시에서 도입했다는 노동이사제 정도가 있다는 걸 알 뿐이다. 내가 알지 못해도 문재인의 공약에서는 노동자가 투쟁하는 인간, 계약하는 인간으로 세우기 위한 것보다는 노동하는 인간으로서 생존의 보호를 위한 것이 주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노동자는 이 자본의 세상에서 현대의 인간은 고사하고 근대의 인간도 되지 못한다. 노동하는 인간으로서의 생존 말고는 아무것도 보장받을 수가 없다. 어찌 보면 이것은 훌륭한 대통령으로서 문재인이 할 일이라고 독촉하기보다는 노동자·노조 스스로가 요구하고 투쟁해서 쟁취해야 할 일인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일하고 투쟁할 때, 그는 더는 노예가 아니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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