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조선일보는 17일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에, 용역업체들 “문 닫으란 소리”>라는 기사를 썼다. 자본의 요구를 꼼꼼하게 반영한 기사다.

무기계약직을 처음 꺼내 든 건 은행권이었다. 상대적으로 고액 연봉자가 많은 시중은행이 늘어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국민은행이 2007년 10월17일 8천400여명의 무기계약직 전환 방침을 발표하고, 이듬해 처음 실시했다. 은행권 노사합의 결과였다.

무기계약직이라는 말은 이렇게 등장했다. 무기계약직은 정규직처럼 고용은 정년까지 보장해 주지만 임금은 직군을 분리해 정규직과 차별한다. 은행 창구직원, 콜센터 상담원 등이 이 별도직군에 포함됐다. 당시만 해도 은행 창구직원은 대부분 여성이고, 그들 중 상당수는 원래 해당 은행 정규직이었다가 결혼·임신·육아 등의 이유로 경력단절된 여성들이 많았다.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무기계약직 전환 대책으로 수용한 지 10년이 흘렀다. 정부는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이라고 우기며 비정규직 통계에도 안 잡는다. 임금이 정규직과 절반이나 차이 나는데도.

은행권은 일단 고용부터 안정시킨 뒤 임금과 복지를 노사 교섭에서 차근차근 해결하겠다는 복안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 갔다. 한 번 분리된 직군은 영원히 계급이 됐다. 이젠 신규 직원을 무기계약직으로 채용하는 경우도 허다해 무기계약직은 하나의 고용형태로 굳어지고 있다.

‘비정규직’이란 단어는 노동법 어디에도 없지만 노동자 절반이 ‘비정규직’이다. 우리는 97년 구제금융 이후 비정규직이 급속히 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87년 7월 노동자대투쟁의 서막을 열었던 현대중공업·현대엔진 가두시위 때 중장비를 앞세워 남목고개를 넘던 노동자 대열의 맨 앞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비정규직이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30년 전 싸움으로 정규직이 됐다. 고 정주영 회장은 73년 현대조선소를 만들면서 아파트 건설 경험만 믿고, 조선업도 건설업처럼 다단계 하청구조로 운영하면 된다고 여겼다. 그렇게 15년을 운영하면서 현대자본은 조선업이 건설업과 달리 하나의 지휘체계하에 고도의 협업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조선소 곳곳에서 업체별 소통이 막혀 크고 작은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87년 때마침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 하청문제를 제기하자, 현대자본은 노동자 요구를 전격 수용해 대거 정규직화가 이뤄졌다. 눈이 밝은 연구자들은 지금 조선업 불황을 두고 30년 전 교훈을 잊은 채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직후 해양플랜트 중심으로 비정규직을 90%까지 극단적으로 늘려 위기를 지연시킨 결과라고 말한다.

3저 호황(86~88년)이 끝나갈 무렵인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에도 비정규직은 급격히 늘었다. 노동운동이 전노협을 만들 무렵 비정규직 급증은 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늘어난 비정규직 비율과 맞먹는다. 대공장 노조의 임금인상 투쟁을 혁명으로 미화하고,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가 공민권을 획득하던 90~94년 사이 자본은 비정규직을 급속히 늘렸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겪은 자본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분리를 확실한 노동통제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노동은 90년대 말에서야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민주노총에 ‘비정규직’이란 구호가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격차가 심각해진 사회에서 당장은 자회사 설립이나 무기계약직 전환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봉합할 순 있다. 그러나 문제 해결책은 아니다. 늦었지만 무기계약직을 넘어서는 요구를 사회화해야 한다. 새 대통령이 간접고용 비정규직 대표사례인 인천국제공항공사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풀겠다고 한 만큼 역량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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