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A씨는 삼성전자 LCD사업부 기흥사업장 식각공정에 오퍼레이터로 약 6년간 근무하면서 발병한 만성골수성백혈병 상병에 대해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역학조사 결과를 이유로 산재를 불승인했다. 역학조사 결과에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A씨가) 젊은 나이에 발병했고, 다양한 화학물질을 취급했으나 유해물질 중 포름알데히드 노출은 확인되지 않았고, 방사선 노출은 자연방사선 수준이며, 벤젠 누적 노출량은 연간 0.228피피엠(ppm)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노동자 B씨는 삼성전자 기흥공장 PA부서 불량분석 업무에 약 7년간 근무하면서 발병한 급성골수성백혈병 상병에 대해 산재신청을 했다. 공단은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역학조사 결과, 즉 "사용했던 유기화합물 BOE(불산·불화암모늄·계면활성제 혼합물)의 경우 계면활성제가 포함돼 있고, 이로 인한 산화에틸렌에 노출될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으로 추정되는 점, 백혈병을 일으킬 수 있는 발암성 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은 낮다고 추정하는 점" 등을 사유로 들어 불승인했다.

직업성암 등에 대한 역학조사 과정은 ‘노동자 조사·면담→현장 조사→현장 시료채취 및 분석→작업환경평가분과 심의→업무관련성평가분과 심의’로 이뤄진다. 역학조사라는 업무관련성 조사 과정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규칙(22조)에 근거해 시행된다. 해당 조항은 공단이나 판정위원회가 업무상질병 여부를 결정할 때 필요하면 ‘한국산업안전공단 등’에 ‘자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문제는 역학조사가 자문이 아니라 산재 결정의 핵심적 근거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실제 노동자 A·B씨 사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역학조사가 수행된 수천 개 사건 중 단순한 ‘자문’은 없었다. 다시 말해 역학조사 결론을 공단이나 판정위가 뒤집은 적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역학조사라는 ‘직업환경의학전문의로 구성된 업무관련성평가분과의 결론’은 법률(법률상 상당인과관계)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데도 산재 결정 과정은 산업보건학(작업환경평가분과)과 직업환경의학(업무관련성평가분과)에 매몰돼 있다.

두 번째, 자문 기능을 한다는 역학조사 과정이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작업환경평가분과 또는 업무관련성평가분과 위원으로 참여하는지, 그 회의에서 논의와 결정이 어떻게 되는지 공개되지 않는다. 회의 결론이 역학조사 회신서에 간략히 기재될 뿐 그 과정과 내용은 비공개가 원칙이다. 재해자나 대리인이 분과회의 등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실질적으로 산재 여부가 결정되는 과정에서 핵심인 ‘역학조사기관의 회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

세 번째, A·B씨 역학조사 회신서를 보면 "작업환경측정 기록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 저농도 유기용제 노출 인정, 과학적으로 증명된 요인이나 유의할 수준으로 노출된 요인은 발견할 수 없음"(A씨), "노출수준 및 발암물질에 노출가능성이 낮은 점"(B씨)이라고 기재돼 있다.

이를 통해 역학조사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과거 노출수준과 업무환경을 십수 년이 지난 시점에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과거 노출수준과 업무환경은 정확하게 측정·평가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며, 측정이나 평가가 됐다고 하더라도 이를 온전히 신뢰하기 힘들다. 현재 작업환경과 유해물질 노출 정도는 과거에 비해 개선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측정 결과만을 토대로 과거를 추정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업무관련성을 부정하는 삼성전자 같은 회사가 제공하는 자료를 기반으로 이뤄진 조사를 신뢰하기는 어렵다. 회사의 자료 은폐 혹은 미비는 구체적으로 검토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유해물질 노출수준과 노출량에 매몰된 역학조사를 기반으로 이뤄지는 결정 과정이 산재보험법의 법리와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최근 법원은 한국지엠 도장공장에서 근무하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이 발병한 노동자 사건에서 "업무와 관련된 질병 발생은 의심되는 유해물질의 노출 누적량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미량이라 할지라도 유해물질 영향의 세기, 노출 사실의 유무만으로 관련성을 의심해 볼 수 있다"며 "원고에게 이 사건 상병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특별한 요인이 없는 상태에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 사건 상병에 이르렀고, 현시점에서 자신의 벤젠 노출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입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시했다(서울행정법원 2017. 2. 10. 선고 2013구단53144 판결).

지금도 역학조사는 의학적·자연과학적 입증을 노동자에게 강요하고 있다. 산재보험법상 인과관계는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돼야 하는 것이 아니다(대법원 2014. 6. 12. 선고 2012두24214 판결). 역학조사와 심의 과정을 개선하는 것은 산재보험법 정신에 부합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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