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권 공인노무사(금속노조 법률원)

폐암으로 사망한 노동자의 산업재해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26살 나이에 첫 직장인 반도체 사업장에 입사했다. 이후 폐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 자신의 첫 직장에서 꼬박 19년을 일했다.

자신의 청춘을 고스란히 바친 회사는 삼성은 아니지만 반도체 조립업체로 업계에서 유명한 곳이다. 사업을 시작한 지 50년이나 됐고, 그동안 꾸준히 성장해 지난해에는 1조4천4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회사 홈페이지에는 인천 송도에 대규모 신규 사업장을 건립해 100년 기업으로의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다는 경영진의 야심찬 포부가 드러나 있다.

회사가 이렇게 승승장구하는 동안 자신의 청춘, 심지어는 목숨까지 바친 노동자들은 어떤 보호를 받았을까. 망인은 반도체 조립공정 중 몰드공정에서 설비를 유지·보수하는 업무만 19년간 했다. 몰드공정은 반도체 조립공정 중에서도 특히 유해한 공정이다. 반도체를 보호하기 위해 그 주위를 고온에서 녹인 수지(몰딩컴파운드)로 감싸는 과정에서 벤젠·포름알데히드 같은 발암물질이 발생한다. 기계 내부는 늘 검은 분진(카본블랙)이 가득하다. 설비 유지·보수 업무는 업무 특성상 기계 내부 유해물질에 직접적으로 노출된다.

동료 노동자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망인의 작업 중 모습은 순백의 방진복을 입은 첨단 반도체산업 노동자가 아니라 검은 분진을 가득 묻힌 연탄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 가깝다.

2012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발간한 <반도체산업 근로자를 위한 건강관리 길잡이>에는 앞서 언급한 유해물질들이 몰드공정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노출을 방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치들을 명시하고 있다.

"몰드장비의 작동오류 등을 해결하기 위해 장비커버나 장비창문을 열고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호흡용 보호구를 착용하도록 해야 함. (…)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등 유해부산물이 발생하지 않는 몰딩컴파운드·금형세정제로 대체할 필요가 있음."

그러나 망인은 기체 형태의 유해물질은 물론이고 검은 분진이 새어 들어오는 것조차 차단할 수 없는 얇은 부직포 마스크만 지급받았을 뿐이다. 회사는 관련 물질안전보건자료(MSDS)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회사가 스스로 밝히지 않는 한 유해 부산물이 발생하지 않는 몰딩컴파운드와 금형세정제 제품으로 대체됐는지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즉 ‘길잡이’ 발간 이후에도 망인은 그 이전 십수년과 똑같이 위험한 작업장에서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언제쯤 반도체 노동자들은 안전한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을까.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의 헌신적 활동 덕분에 반도체산업의 위험성이 한국 사회에 부족하나마 알려지고 직업병 일부가 산재로 인정받는 성과를 힘겹게 얻어 낼 수 있었지만 한국 사회에서 기업은 여전히 노동자 안전에 관해서는 ‘규제프리존’이다.

구체적인 요구로 제기하진 않았을지라도 촛불운동의 염원에는 노동자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라는 요구가 분명 포함돼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은 '이윤을 앞세우는 자본'과 '정권의 방조'로 인해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매년 2천400여명이 죽는 산재사망,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 가습기 살균제 참사, 지진 등 노동자·시민의 죽음이 반복됐음에도 촛불민심이 만들어 낸 조기 대선에서 생명과 안전 공약을 적극적으로 내거는 후보를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문재인 대 안철수 양강 구도인 이번 대선에서 누가 당선하더라도 이윤을 앞세우는 자본과 정권의 방조(또는 공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박근혜의 유산이자 노동자 안전과 정면충돌할 규제프리존법에 관해 문재인 본인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문재인이 삼성과 손잡기 위해 얼마 전 중앙일보 전 회장 홍석현을 만나 입각을 제안했다고 한다.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 본 익숙한 ‘정경유착’이 떠오른다. 그가 규제프리존법에 관해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는 이유도 될 것이다.

기업 이윤을 위해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희생시키는 적폐를 청산하는 투쟁이 대선 이후에도 계속돼야 할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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