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정 기자
다국적 제약업계에서 벌어지는 강제퇴직(강퇴)·찍어퇴직(찍퇴) 수법이 진화하고 있다. 미국계 글로벌 헬스케어 회사인 ㈜박스터 강제퇴직 논란이 대표적이다.

25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최근 2년 사이 한국화이자제약·한국노바티스·한국아스트라제네카 등에서 조기 희망퇴직 프로그램(Early Retirement Program·ERP)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강퇴·찍퇴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화이자제약은 2015년 7월 말 "경영위기를 극복하겠다"며 5개 사업부 중 특정 2개(컨슈머헬스케어사업부·글로벌이스태블리시트제약) 사업부만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해 찍퇴 논란에 휩싸였다.

같은해 12월 한국노바티스도 ERP를 시행했다. 공식적으로는 희망퇴직이지만 내부적으로는 30명을 구조조정 목표로 정해 놓고 3차에 걸쳐 퇴직압박을 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아스트라제네카는 지난해 6~7월 전 직원 대상 ERP를 하는 과정에서 비즈니스리뷰(사업계획에 대한 논의)를 한다는 명목으로 장기근속자들을 대상으로 일대일 면담을 하면서 퇴직을 압박했다. 당시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본사가 각 글로벌 법인에 1천만~1천400만달러의 예산절감 지침을 내렸다. 한국아스트라제네카는 1천100만달러 절감 목표액 중 500만달러를 인건비에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희망퇴직으로 목표가 충족되지 않자 회사는 "조직개편을 하겠다"며 희망퇴직 신청 거부자·장기근속자·여직원들을 대상으로 추가 퇴직을 압박해 노동계의 비난을 샀다.

박스터는 올해 들어 다국적 제약회사 중 처음으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업계는 "이례적인 사례"라고 입을 모았다. 공식적인 ERP도 하지 않고 몇몇 직원들에게 권고사직을 요구한 데다, 업계 평균인 '2n(근속연수)+α'를 한참 밑도는 보상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다국적 제약사들은 희망퇴직에 강제성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1차적으로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퇴직신청을 받은 뒤 부족한 인원을 찍퇴나 강퇴로 보충한다. 그런데 박스터는 지난 14일 7명의 직원에게 뜬금없이 사직을 권고했다. 권고사직 대상자로 선정된 이유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보상금으로는 근속연수에 9개월분 임금 추가지급을 제안했다.

김문오 민주제약노조 위원장은 "그나마 화이자·노바티스·아스트라제네카는 희망퇴직 모양새를 갖추고 보상금이라도 넉넉하게 줬는데, 박스터는 권고사직을 빙자해 보상금까지 대폭 줄여 내쫓으려 한다"고 비판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박스터가 공식적으로 ERP를 돌리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권고사직 꼼수를 쓰는 것 같다"며 "업계에서 처음 보는 일"이라고 말했다.

노조 관계자는 "노조 지부가 속한 13개 회사가 참여하는 모임이 있는데, 그들끼리 상황을 공유하다 보니 점점 악랄하게 진화하는 것 같다"며 "박스터 식 구조조정이 성공하면 제약업계 전반으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이날 오후 화학노련과 민주제약노조 박스터지부, 박스터코리아노조는 박스터 본사가 있는 서울 세종로 교보빌딩 앞에서 '강제퇴직·찍어퇴직 반대, 고용안정 쟁취 결의대회'를 열고 고용보장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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