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대선후보들이 최근 노동단체를 잇따라 방문했다. 노동단체 지도부와 간담회를 연 후보들은 하나같이 “내가 무엇이든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정부 시절 내렸던 행정지침과 행정해석을 폐지하겠다고 공언했다. 노동계로선 절박한 문제이자 현안이다. 어떤 후보는 “노동자들과 고락을 함께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반면 다른 후보는 “주변에 노동계 동지들이 많다”고 과시했다.

이런 발언을 접하면 후보들이 말로 때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공약사항을 뜯어보면 후보들의 발언에 해당하는 사항이 없거나 모호한 표현만 있기 때문이다. 후보의 약속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논외다. 대통령이 되면 그만한 권한이 있다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결국 후보의 말은 허세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후보들은 ‘강한 남자’로서의 풍모만 남긴다. 이런 생각이 과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노동전문가들도 “19대 대선에서 노동정책이 사라졌다”고 여긴다. 적어도 18대 대선에서 이런 평가는 나오지 않았다.

18대 대선은 박근혜 대 문재인 양강 구도로 치러졌다. 선거 쟁점으로 경제민주화가 부각됐다. 보수 후보인 박근혜가 경제민주화 깃발을 들고, 전태일 열사 동상이 세워진 서울 청계천 거리를 방문했다. 그야말로 광폭 행보였다. 문재인과 박근혜는 노동공약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당시 현대자동차가 소재한 울산과 쌍용자동차가 있는 평택에서 사내하청·해고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했다. 당시 박근혜 후보는 사내하청 노동자 보호법 제정과 공공부문 상시·지속적 비정규직 고용폐지를 내걸었다. 문재인 후보도 기간제 사용사유 제한, 공공부문 아웃소싱 전면금지를 약속했다. 두 후보 모두 정리해고제를 관에 넣어 묻을 기세였다. 또 노사정 사회적 대타협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공언했다. 18대 대선에서 노동공약은 경제민주화의 핵심 의제였다. 물론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근혜는 공약사항을 지키지 않았다. 대선 때 약속은 ‘말 풍선’이 돼 버렸다.

19대 대선도 양강 구도다. 문재인·안철수로 선수가 바뀌었다. 그런데 두 후보의 노동공약을 찾아보면 허전해진다. 일자리 공약은 있지만 노동공약은 풍성하지 않다. 노동공약은 그저 일자리 개수나 지원금액으로 정리돼 발표됐다. 공약집에서 새 정부의 노사관계 비전이나 노동권 보장을 위한 제도개선 사항을 찾기 힘들다. 18대 대선과 비교하면 노동공약이 미흡하다.

이를테면 일자리 확대는 정부재정 투입만으로는 안 된다. 노동시간단축이 필수적이다. 공정성장을 위한 격차해소도 정부가 무작정 밀어붙일 수만은 없는 사안이다. 적어도 노동시간단축이나 임금격차 해소는 노동계 협조 없이 진척시킬 수 없는 정책들이다. 그럼에도 두 후보는 새 정부에서 노사관계를 어떻게 풀겠다는 구체적인 비전과 정책을 내놓지 않았다.

아예 일부 후보 캠프는 대통령선거 노동단체 토론회에서 공약사항 질의응답서조차 제시하지 않았다. “공약집에 없는 질의사항에 대해선 답변하기 곤란하다”는 궁색한 이유를 댔다.

노동계는 문재인·안철수 후보에 낙제점을 주지는 않았지만 실망한 분위기가 역력하다. 지난 대선과 사뭇 다른 풍경이다.

"중도를 잡는 후보가 이긴다"는 속설 때문일까. 19대 대선에서 보수적 의제인 안보·경제가 부각된 반면 진보적 의제인 노동이 설 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촛불이 만든 장미대선의 역설이다. 후보들은 공약이 없거나 모호한 빈틈을 말로 메운다. 강한 남자 이미지만 심으려 한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스트롱맨(강한 남자)을 자처했다. 대선에서 "미국을 위대하게, 강하게 만들겠다"고 했다. 그의 당선 이후 강한 남자 이미지가 선거에서 통한다는 속설이 부풀려졌다. 하지만 트럼프는 최근 꼬리를 내렸다. 공약사항을 철회하거나 갈지자 행보를 보인다. 강한 남자는 선거를 위한 허세였을 뿐이었다. 최근 그는 ‘모호한 남자’로 불린다. 19대 대선에서 양강 구도를 형성한 문재인·안철수 후보가 트럼프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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