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회 흥행공식을 새로 쓰는 주제가 있다. 바로 4차 산업혁명이다. 관련 토론회에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놀라운 것은 오전 10시에 시작해 오후 6시에 끝나는 토론회임에도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한 달여 남은 19대 대통령선거 토론회에선 후보자가 자리를 뜨면 토론장이 한산해진다. 반면 4차 산업혁명 토론회는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질문과 답변이 오간다. 이런 진지한 토론회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4차 산업혁명은 뜨거운 감자다.

산업혁신이 확산하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고개가 끄덕여질 수 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 도입과 자동화를 비용절감 정도로 취급하는 나라에서 산업혁명을 논의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문뜩 '알파고'가 떠오른다. 우리 사회는 인간과 인공지능(AI)의 바둑대결이 만든 이상 열기와 후유증에 휩싸여 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신조어를 활용한 마케팅이 등장하고, 관련 대학 학과와 직업훈련이 생긴다. 정부는 공장의 간접부서(품질검수·포장 등) 자동화에까지 '스마트공장' 이름을 붙이고 지원을 한다. 이러니 정부 자금을 유치해 주겠다는 실체 없는 4차 산업혁명 마케팅마저 성행한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명확한 정의나 체계적인 이해도 없이 휩쓸려 가도 되는 걸까. 종전과 다른 기술원리와 구성요소가 융합된 것이 4차 산업혁명이라면 그 '정수'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전제돼야 우리나라에 맞는 산업혁신도 가능하고, 기술교육 훈련도 할 수 있다. 이런 상식에 대한 진지한 논의나 문제제기가 이뤄지지 않은 채 이상열기만 팽배하다.

최근 4차 산업혁명 관련 토론회를 개최한 사문걸 독일에버트재단 한국사무소장은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를 많이 얘기했기 때문에 산업 4.0이나 노동 4.0에 관련된 이해와 전략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어서 놀랐다”고 했다.

어쩌겠나. 독일이 산업 4.0과 노동 4.0을 추진하고 있을 때 박근혜 정부는 하르츠개혁을 거론하며 노동개혁을 부르짖었다. 하르츠개혁은 실업난에 빠진 독일이 노동시장 유연성을 확대하기 위해 2002년부터 시행한 정책이다. 산업 4.0과 노동 4.0은 하르츠개혁과 완전히 딴판이다. 기술체계와 생산방식, 노동과정 재조직화가 다른 전제에서 시작된다. 독일이 산업 4.0과 노동 4.0을 한창 추진하고 있을 때 박근혜 정부는 그들의 '흘러간 정책'인 하르츠개혁을 롤모델로 삼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일의 하르츠개혁, 노동개혁을 주창했던 나라에서 4차 산업혁명을 거론하는 건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혹자들은 4차 산업혁명을 ‘뜬구름 잡기’라거나 ‘공포 마케팅’이라고 진단한다. 진단에 동의하지 않지만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2011년 독일은 산업 4.0이라는 신조어를 띄우면서 제조업 혁신을 주창했다. 애플·구글 같은 민간기업이 정보통신기술 혁신을 이끈 미국과 달리 독일은 정부 주도적인 산업혁신을 제기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강했던 제조업에다 상대적으로 약했던 정보통신기술(ICT)을 융합하겠다는 발상이다. 독일의 경우 기술혁신 수용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적극적 역할을 고려했다. 그래서 추진한 것이 노동 4.0이다. 디지털 기술 확산에 따른 일자리 감소와 고용관계 변화에 대응하자는 취지다.

지난해 노동 4.0 초록이 발표되면서 그 윤곽이 드러났다. 눈에 띄는 대목은 산업 4.0과 노동 4.0을 추진하면서 정부와 학계, 노와 사, 소비자와 시민단체까지 참여한 거버넌스가 진행됐다는 점이다. 독일의 산업혁신은 거버넌스의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사회적 대화에 의한 산업혁신"을 하는 셈이다.

한국노동연구원과 독일에버트재단 한국사무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다니엘 부어 독일 튀빙겐대 교수는 “산업 4.0과 노동 4.0은 불가분의 관계이고, 어느 한쪽도 다른 한쪽 없이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독일 관계자들은 기술혁신이 산업혁신과 사회혁신으로 이어지려면 수용자인 노동자와 사회와의 소통과 참여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 대목이다. 현재의 산업혁신을 어떻게 정의하고, 산업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 박근혜 정부 시절 노동개혁을 위한 사회적 대화는 파산했다. 촛불혁명 이후 국가대개조를 논의하는 시점이다. 우리에게 4차 산업혁명만큼이나 절실한 것은 새로운 사회적 대화 전략(거버넌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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