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매 순간 모멸감으로 피눈물이 흐른다. 목을 누르는 실적압박에 하루하루 질식할 것 같다."

허권(53·사진) 금융노조 위원장이 설명한 금융노동자들의 일상이다. 보수언론은 ‘귀족노동자’라 부르지만 현실은 반대라는 얘기다. 허권 위원장은 지난해 말 노조 25대 위원장에 당선했다. “경쟁을 멈춰 세우겠다”는 공언에 조합원 절반 이상이 표를 줬다. 올해 2월14일 취임 후 두 달이 숨 가쁘게 흘렀다. 지부별 투쟁 현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터졌다. 그 와중에 '과당경쟁 근절 TFT'를 꾸렸다. 노조가 조합원들에게 가해지는 실적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별도 조직을 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2일 오후 서울 다동 노조사무실에서 허권 위원장을 만났다. 그는 “조합원들이 매일매일 직장을 계속 다니기 힘들 정도의 모멸감을 안고 일한다”며 “과당경쟁을 반드시 멈춰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 취임 후 두 달이 지났다. 어떻게 지냈나.

“일이 너무 많아 정신없이 지내고 있다. 지난해 성과연봉제 저지투쟁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다.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가 사실상 와해돼 이를 복원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에 여론과 국민의 시선이 쏠린 틈을 타서 사측의 도발이 심상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KEB하나은행의 노조 말살 시도가 대표적이다. 수협은행장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내려는 시도까지 한다. 한국금융안전은 부실기업의 적대적 인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산림조합중앙회는 지난해 총파업 참여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가했다. 한국씨티은행의 대규모 점포 폐쇄 시도까지 하나하나가 금융노동자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다. 노조 차원에서 대응책을 마련하고 지원하기 위해 바쁘게 뛰고 있다.”

- 성과연봉제 투쟁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전망은 어떤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성과연봉제가 재벌과 정권의 유착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드러났다. 국민도 성과연봉제를 없어져야 할 적폐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 수많은 금융·공공 노동자들이 지난 1년 동안 총파업을 해 가며 성과연봉제 반대를 외쳤다. 대선후보들이 이러한 국민의 바람을 잘 알 것으로 기대한다. 대선후보들에게 강조하고 싶다. 성과연봉제는 2천만 노동자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강제적으로 성과연봉제가 도입된 곳에서 여러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차기 정부가 박근혜 정부처럼 성과연봉제를 강요하면 노조는 투쟁할 수밖에 없다."

- 2016년 단체협약 갱신을 위한 교섭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데.

“지난달 말 사측에 사용자단체 복귀를 공식 요구했는데 아직 구체적인 답변이 없다. 사용자들이 복원을 원치 않고 있다기보다는 정치 상황을 감안한 게 아닌가 싶다. 사용자들도 사용자단체를 통한 교섭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안다. 주춤거리는 이유는 탈퇴할 때 그랬듯 정부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대선 이후 사용자들이 명분을 찾아 협의회에 복귀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렇게 만들 것이다.”

"시간 단위 실적압박, 하루하루 피 말라"

- 선거에서 과당경쟁 근절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조합원들이 과당경쟁 탓에 현장에서 질식하고 있다. 하루·일주일·분기·반기·1년의 개인별 목표가 끊임없이 부여된다. 카드·펀드·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상품별 목표가 겹치면 한꺼번에 달성해야 할 목표가 수십 가지가 된다. 특별 프로모션과 핵심성과지표(KPI)가 조합원들을 이중 삼중으로 옥죈다. 영업추진본부와 마케팅 부서는 매일 시간 단위로 목표 달성을 압박한다. 직원별 실적 순위를 출력해 영업점 벽면에 붙여 놓기도 한다. 하루하루 피가 마를 수밖에 없다. 조합원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모멸감을 호소한다. 은행 순이익이 2조원대다. 경영진에게 묻고 싶다. 얼마만큼 수익을 내야 만족하겠나. 과도한 수익은 출세하려는 경영진과 배당금 더 받으려는 외국계 대주주에게만 도움이 된다. 국민 입장에서도 과당경쟁과 단기 실적주의는 불완전판매 가능성만 키운다. 현행 KPI를 대체하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개선할 것은 개선하고, 없앨 것은 없애야 한다.”



인터뷰가 있던 날 노조는 ‘과당경쟁 근절 TFT’ 1차 회의를 열었다. TFT에는 9개 시중·국책·지방은행 지부가 참여한다. 허권 위원장은 이날 회의에 참석해 “금융회사들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KPI는 도입 취지와 달리 직장내 노동환경을 전방위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으로 변질·악용되고 있다”며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반영해 소모적인 과당경쟁을 청산하고 금융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달라”고 주문했다. 노조는 TFT를 통해 상반기 중 은행별 KPI 분석과 실태조사를 완료할 예정이다. 이후 대안을 마련해 사용자와 금융당국에 대책 마련을 요구할 계획이다.

"친노동자 정권 창출에 모든 역량 집중"

- 대선에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6만 선거인단을 조직해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지부대표자회의에서는 더불어민주당 경선 승리자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조만간 경선 승리자인 문재인 후보와 정책협약식을 한다. 더불어민주당과는 금융노동자 현안과 금융산업 발전 방향을 놓고 지속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친노동자 정권 창출을 위해 조합원을 독려하고 모든 역량을 쏟아붓겠다.”

노조는 14일 국회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지지선언을 하고 정책협약을 체결한다. 이달 25일까지 진행되는 한국노총 지지후보 선정을 위한 조합원 총투표에서 노조 입장을 적극 알린다는 방침이다.

- 차기 정권에 바라는 금융정책이 있다면.

“금융시스템 공공성과 안정성 강화를 위해 노력해 주길 바란다. 금융노동자의 고용안정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사가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금융권 전문성 강화도 필요하다. 비전문가 낙하산은 더 이상 안 된다. 지방은행과 서민금융기관의 균형발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임금격차 해소를 통한 좋은 일자리 창출,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급격한 점포 축소 관련 대책 마련도 차기 정부의 주요 과제다.”

허권 위원장은 특히 “정부는 임금피크제와 관련해 금융공기업에서 나타나는 불합리한 행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정부가 정년연장에 따라 공공기관에 임금피크제 도입을 강제하고서도 인건비 총액을 증액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허 위원장은 이어 "금융공기업들이 기존 직원들의 임금을 깎아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그렇다면 임금피크제를 강제하기 위해 꼼수 정책을 쓴 것으로 몰염치한 일"이라며 "노조 차원에서 강력하게 대응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 임기 동안 핵심적으로 추진할 사업은 뭔가.

"금융노동자들은 영업현장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실적압박을 받고 있다. KPI 개혁과 성과연봉제 저지가 최우선 과제다. 정부가 금융공기업을 수족처럼 부린다.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공공기관운영법) 폐지를 추진하겠다. 이를 기반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산별노조 면모를 갖춰 가겠다. 현재 '산별노조 강화 TFT'를 운영 중인데, 최근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발주한 용역 결과물이 나온 상태다. 산별 강화를 위한 인력운용과 재정구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조만간 현실에 적용하겠다. 진정성을 갖고 금융노동자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위원장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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