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미경 민주노총 국제국장

촛불의 힘으로 권력을 끌어내린 뒤 치러지는 19대 대선이 눈앞에 다가왔다. 과거 정권의 적폐를 해소하겠다는 약속은 넘쳐나지만 새로운 사회를 희망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크게 울리지 않고 있다. 노조를 만들기도 힘들고,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되고, 노조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처벌받는 현실은 국제기준과 거리가 멀다. 최저임금 1만원과 노조할 권리 보장 등 5대 의제·10대 요구안을 발표한 민주노총이 <매일노동뉴스>에 기고를 보내왔다. 5회로 나눠 싣는다.<편집자>



올해 3월 국제노동기구(ILO) 이사회는 삼성 무노조 정책과 삼성전자서비스 노조파괴에 대한 ‘결사의 자유 위원회’ 보고서를 채택했다. ILO는 특히 삼성그룹의 무노조 방침을 집약한 ‘S그룹 노사전략’ 문건을 주목했다. 삼성전자서비스가 간접고용을 남용해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봤다. 간판 기업이 국제노동기준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노조할 권리’를 손쉽게 무시해 버릴 수 있는 현실은 한국의 노동기본권 보장 수준이 글로벌 스탠더드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삼성이 국제노총(ITUC)의 ‘기업의 탐욕을 멈춰라’ 캠페인의 첫 번째 대상이 된 이유다. 국제노총은 ‘삼성: 기술은 현대적, 노동조건은 중세시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지난해 10월 발표하고, 전 세계 삼성의 공급사슬 내에서 벌어지는 무노조 방침에 따른 노조파괴·산업재해·불안정 고용 남용과 하청노동자에 대한 착취에 대해 삼성의 책임을 묻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



‘초국적기업의 공급사슬 전체에 대한 책임 묻기’는 세계적 추세



세계화 시대에 노동권에 대한 법·규제가 느슨한 나라에 공장을 짓고 현지 노동자들을 고용하거나 그러한 나라에서 생산된 자재나 부품을 공급받는 것은 기업이 노동자들의 노동을 통해 이익을 얻으면서도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할 책임을 회피하는 유력한 수단이다. 이를 제어하기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 지침, ILO 다국적기업 삼자선언 등이 채택돼 쓰이고 있다. 이런 기준들은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아동노동·강제노동·차별 금지 등의 원칙에 관한 ILO 핵심협약을 포함해 환경·노동안전보건·기업 윤리에 관한 국제기준을 준수하는 것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이 기준들은 초국적기업들이 글로벌 공급사슬을 활용해 이윤은 극대화하면서도 책임은 최소화하려는 실태와 관련해 국제기준 준수의무를 본사나 자회사뿐 아니라 공급사슬 전체, 혹은 하청·부품 업체에도 적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준수의무를 지키지 않아 발생한 피해를 사후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넘어 기준 위반의 위험을 미리 예측하고 이를 예방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준들은 기업의 인권·노동권 침해 예방책임을 ‘자발적 준수’ 원칙에 의존해 왔다. 침해에 대한 구제 메커니즘이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법적 책임을 부과하기보다는 ‘문제 해결’에 초점을 뒀다. 하지만 삼성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자발적 준수’에 맡겨 두다가는 기업의 의무와 책임이 실행되지 않는 원칙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삼성 국제노동기준 위반,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ILO는 2016년 총회를 열고 ‘글로벌 공급사슬 내 양질의 일자리’에 관한 새로운 기준 마련을 목표로 한 논의를 개시했다. 유엔에서도 기업과 인권에 관한 국제법적 구속력을 지닌 조약을 도입하기 위한 정부간워킹그룹(IGWG)이 구성됐다. 유럽 각국에서는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 지침'을 실행하기 위한 국가정책기본계획(NAP)을 수립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뇌물죄 혐의로 구속된 후 치러지는 대선에서 유력 후보들이 재벌개혁에 대한 여러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재벌 대기업의 국제노동기준 및 기업과 인권에 관한 국제기준 준수를 강제하기 위한 방안이 공약의 핵심이 돼야 한다. 지난달 27일 프랑스에서 제정된 ‘모회사와 발주기업의 인권 실사 의무에 관한 법’을 참조할 수 있다. 대기업의 인권침해 예방대책 수립을 의무화하고 위반시 고액의 과태료와 민사상 책임을 규정하는 내용의 법이다. 책임의 범위를 기업그룹 내 직접 고용된 노동자뿐 아니라 하청업체·납품업체 전반으로 확대한 것도 눈에 띈다. 대선 후보들과 정당들이 눈여겨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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