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한 중요한 계기 중 하나는 국가가 빚내는 방법을 혁신한 것이었다. 우리는 보통 자본주의 시작을 산업혁명이나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으로 기억하지만, 자본주의 요체를 ‘돈’이라고 보면, 국가가 빚을 내기 위해 쥐어짜서 낸 아이디어가 산업혁명만큼이나 자본주의 발전에 중요했다.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1625년 이후 두 차례에 걸친 국내외 전쟁으로 영국의 국고는 바닥이 났다. 1688년 명예혁명과 그 다음해 권리장전으로 왕위에 오른 윌리엄 3세는 국고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제도를 본떠 무기한 이자를 지급하는 국채(영구채권)를 발행했다. 권리장전으로 의회가 과세를 관리하게 돼 이전같이 마구잡이로 세금을 걷을 수 없어 택한 궁여지책이었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영국 왕실과 관련한 전쟁을 일으켜 윌리엄 3세는 전쟁자금 모금이 절실했다. 하지만 난장판인 영국 왕실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라 이자를 높여도 국채를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런던의 금융가들이 아이디어를 냈다. 금융가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왕실에 자금을 빌려줄 테니, 대신 왕실이 자신들에게 정부가 승인하는 독점적 은행권(지폐)을 발행할 수 있는 특혜를 달라는 것이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금화가 화폐로 사용됐는데, 금화의 불편함으로 인해 은행에 금을 보관했다는 영수증인 은행권(지폐)도 사용이 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금과 달리 은행권 지폐는 은행에 아주 큰 혜택이 있었다. 금 보관 영수증을 가진 사람들이 금을 매번 찾지 않기 때문이었다. 은행은 영수증 보유자가 금을 찾지 않는 기간 동안 이 금을 다른 사람에게 대여해 주고 이자를 받을 수 있었다. 왕과 의회가 법으로 이 은행권의 유통을 보장해 금화보다 은행권 지폐가 일반 화폐로 유통될 수 있다면 은행들로서는 그야말로 ‘대박’이 나는 것이었다.

전쟁자금이 급했던 윌리엄 3세는 앞뒤 가릴 여유가 없었다. 런던 금융가들은 컨소시엄을 꾸려 잉글랜드은행을 세웠고, 영국 정부는 잉글랜드은행에서 120만파운드를 받고, 영구적으로 10만파운드의 이자(이자율 8%)를 지급하기로 계약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은행은 왕실과 의회로부터 유일무이하게 법정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은행으로 승인받았다.

중앙은행과 중앙은행권이 탄생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돈’이 만들어졌다. 은행은 보유한 금화보다 많은 은행권을 발행해 ‘신용’을 창조했다. 은행을 중심에 둔 현대적 금융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산업자본가들은 신용 덕분에 생산한 상품이 현금으로 되돌아오기 전에 또 다른 생산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자본주의적 축적이 가능해진 것이다. 은행 시스템 아래서 자본주의는 폭발적 성장을 할 수 있었다.

한편 왕실이 조세를 걷어 지급하던 국채 이자는 금을 보유한 당대 자산가들에게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19세기 평균 자본수익률이 5% 정도였던 것을 고려하면, 국채 이자는 고수익에 안정적이기까지 한 매력적 금융상품이었다.

그런데 국민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국채 이자의 증가는 결국 조세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 3세는 국민의 복지가 아니라 왕실의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했다. 국민은 전쟁에 나가 죽는 것도 억울한데 일해서 얻은 소득까지 '삥'을 뜯겼다. 물론 금을 소유한 귀족과 부르주아지는 이 과정에서 떼돈을 벌었지만 말이다.

국가의 빚, 그리고 국가가 빚을 조달하는 국채의 출발은 이렇게 매우 '계급적'이었다. 그리고 그 빚으로 탄생한 자본주의 금융시스템 역시 그 출발부터 일하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계급적 기관이었다.

박근혜 정부 4년, 나랏빚이 184조원 늘었다고 한다. 2016 회계연도에 국가채무가 사상 처음 600조원을 돌파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38.3%를 기록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가채무 증가는 어떤 의미일까. '국가채무관리계획 2016-2020'을 보면 박근혜 정부 채무의 대부분은 일반회계 적자와 외환시장 안정용 금융채무다.

일반회계 적자는 부자감세가 원인이었다. 고령화와 복지확대로 고정성 지출은 늘어나는데, 부자들 세금을 깎아 주니까 당연히 적자가 커졌다. 외환시장 안정용 채무는 보통 수출재벌에 유리한 환율을 유지하면서 발생한다.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겠지만, 거칠게 보면 부자들과 수출재벌을 위해 국가채무를 늘렸단 이야기가 되겠다.

국가채무는 상환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연 20조원에 달하는 이자비용도 문제가 된다. 이 중 20~30%는 연기금과 중앙은행이 가져가는 것이지만, 나머지는 모두 민간 금융자본과 외국인이 가져간다. 박근혜와 보수세력이 난리 친 무상급식·무상보육을 모두 합해도 6조원이라는 것을 고려해 보면, 우리에게 얼마나 아쉬운 돈인지 알 수 있다. 부자와 재벌에게 퍼준 국가재정 탓에 겪는 곤란이 이렇다.

국가재정과 채무의 계급적 성격을 좀 더 확실하게 파악하려면, 두루뭉술한 세입·세출 목록과 금융적 중립성으로 포장된 대차대조표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정부를 거치는 현금흐름이 정확히 어디서 시작돼 어디로 끝나는지를 정리해야 한다. 노동자 주머니에서 나온 세금 100만원이 결국 어떻게 분배돼 생산적으로 사용됐는지를 추적할 수 있는 회계방식을 고안하자는 것이다.

장기불황으로 정부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정부 수입지출과 채무의 계급적 성격을 정확히 분석해야 노동자 서민이 무엇을 어떻게 요구해야 할지 분명해진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