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진열대에 서서 물건을 파는 판매원은 백화점 직원이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판매원이 백화점 입점업체에서 파견된 직원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백화점 판매원 유지연(48)씨 처지가 그랬다. 유씨가 다니던 A사는 국내 주요 백화점에 넥타이나 스카프·가방을 수입·제조해 납품했다. 그는 2004년 A사에 입사했다. 영업부 소속 정규직 판매사원이었다. 신분은 2년도 안 돼 바뀌었다. 회사가 2005년 8월 판매원에게 일괄 사직서를 받아 사직처리를 한 뒤 퇴직금을 주고는 판매용역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급여도 매출 실적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수수료로 전환됐다.

유씨는 A사와 판매용역계약을 체결한 후에도 백화점에서 10년 가까이 더 일했다. 그는 2013년 일을 그만두며 퇴직금 지급을 요구했지만 회사는 “우리 직원이 아니다”는 이유를 대며 거부했다. 유씨는 동료들과 함께 회사를 상대로 퇴직금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냈고, 올해 2월8일 대법원은 2심을 뒤집고 유씨의 손을 들어줬다.

◇퇴직금 달라 하니 “네가 뭘 했냐”=대법원은 “판매용역계약을 체결했더라도 실질은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자에 해당한다”며 판매원의 근로자성을 인정했다. 그로부터 40여일이 지났다. 상황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최근 <매일노동뉴스>와 만난 유씨는 “대법원 판결 후 다른 매장 동료에게 퇴직금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법정에서 소송전을 치르기 전만 해도 판매원들은 퇴직금 없이 하루아침에 해고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유씨는 “본사 직원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갑자기 해고되는 판매원들도 있었다”며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하면 그게 해고 통보였다”고 회고했다.

판매원에게 퇴직금을 주는 회사는 거의 없었다. 퇴직금 지급을 요구하며 이른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에게만 몰래 지급했다고 한다. A사도 유씨가 소송을 걸기 전 퇴직금 문제가 불거지자 10명에게 퇴직금을 몰래 주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전까지 유씨도 “퇴직금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소속감이 없지는 않았다. 유씨는 단 한 번도 A사 직원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영업부 소속일 때나 판매용역계약을 체결했을 때나 하는 일은 같았다. 그는 “출퇴근 보고·매출보고·아르바이트 고용 같은 모든 업무보고와 지시는 같았다”며 “매년 체결해야 하는 용역계약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달라진 건 하나였다. 본사에서 월급을 받느냐, 매출 수수료를 받느냐다.

◇"퇴직금 안 받겠다"는 합의서 요구=유씨의 소송 이후 회사는 판매원 관리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유씨에 따르면 회사는 "퇴직금을 받지 않겠다"는 내용의 합의서 작성을 판매원들에게 요구했다. 그는 “근무 중인 판매원에게 합의서 내용을 제대로 보여 주지 않은 채 서명을 강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일부 직원에게는 퇴직금을 줄 테니 노동부에 신고하지 말라고 회유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회사는 합의서 작성에 항의하는 직원에게 “선배들이 소송을 걸어서 그렇다”며 “싫으면 나가라”고 했다고 한다.

회사 탄압에도 A사 퇴사자 15명은 추가 퇴직금 청구소송을 준비 중이다. 유씨 판결 이후 판매원 스스로 근로자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유씨는 “소속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는데, 그건 우리의 착각이었다”며 “회사는 우리를 언제든 쓰고 버려도 되는 존재로 인식했다”고 씁쓸해했다. 그는 “열악한 근로조건에서 일하는 백화점 판매원들에게 이번 판결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며 “초과근무에 시달리는데도 시간외수당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이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 주최 토론회에서 발표한 2013년 기준 통계에 따르면 백화점은 전국에 77개 매장이 있는데, 종사자 중 10~20%만 직영사원이고 나머지 80% 이상이 입점업체 소속 간접고용 노동자였다. 간접고용 노동자 중 다수가 근로자성을 부인받고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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