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겨우내 말없이 방 한구석을 지키고 있던 군자란이 꽃대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창밖의 봄기운이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왔나 봅니다. 군자란은 참 품위가 있습니다. 푸르고 넓은 잎을 겨울에도 그대로 간직한 채 추위를 이긴 자태에서, 긴장감과 고결함이 느껴집니다. 주황색 꽃이 피면 화려하기까지 합니다만, 호들갑스럽지는 않습니다. 군자의 호연지기가 바로 저런 것인가 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갑자기 닥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의 봄이 찾아왔습니다. 아직도 꽃샘바람이 차가운데, 온갖 꽃들이 서둘러 피고 있습니다. 정당들마다 후보가 난립하더니, 정당이 급조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백가쟁명입니다. 뿌리가 깊지 않은 놈들은 금방 시들어 버리기도 합니다만 시궁창가의 독초처럼 지독한 썩은 냄새를 풍기면서 좌충우돌 물을 흐리는 놈들도 많습니다. 그런 놈들은 눈 밝은 농부가 뿌리째 뽑아서 퇴비장에 처박아 버리겠지요. 다른 곡식을 위해 잘 썩어 주기만 해도 고마울 텐데 말입니다.

제일 한심한 당은 자유한국당입니다. 이른바 친박이 중심이 돼 이름만 살짝 바꾼 이 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국회의 탄핵의결을 거쳐 헌법재판소의 파면선고가 있었음에도 같이 책임질 마음은 아예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1천700만 촛불시민의 민의를 '조작된 태극기 난동'으로 가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 판에 대통령을 서로 하겠다고, 어중이떠중이 모두 나와 '생쇼'를 벌이고 있습니다. 박근혜가 국민의 자존심을 그렇게 짓밟더니 이제 그 졸개들까지 나서 입에 담기 힘든 막말을 해 대며, 아예 똥통에 처박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도 썩 미덥지 못합니다. 촛불정신을 살려 적폐청산과 사회개혁을 부르짖고 있지만 과장된 선거구호로만 들리는 것은 나만의 우려일까요? 이런 기회에 스스로 성찰하며 선거관계법 개정 등을 통해 정치개혁을 이루려는 생각도 의지도 없어 보입니다. 지금과 같은 정치 지형에서, 의장마저 배출한 마당에, 더욱이나 촛불이 든든히 받쳐 주고 있는데도 시급한 개혁민생법안 하나 통과시키지 않는 것을 보면 기득권에 안주하는 보수정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습니다. 후보로 출마한 분들도 그렇습니다. 선명한 정책공약으로 국가의 미래 전망을 제시하며 어떻게 실현해 나갈 것인가를 토론하고 지지를 호소하는 것보다 서로 비방하며 헐뜯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국민은 안타까움을 넘어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감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진보정치를 찾아 봅니다. 우리나라의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 민중 중심의 진보정치세력은 있기나 한가? 그들이 만든 진보정당은 아직도 존재하는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나라 진보정치를 살펴봅니다. 요즘 같은 때 당당하게 앞장서서 촛불시민들이 겨울 내내 싸워서 이룩한 정치적 성과를 촛불들과 함께 꽃피워 나가야 할 텐데, 어디 있는지 보이지를 않습니다. 민주노총은 소리 높여 정치세력화를 외치더니 결정적 시기에 정치방침도 세우지 못하고 대통령선거에도 조직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백남기 농민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원탁회의를 주재하는 등 최선을 다했지만 별 성과가 없어 보입니다. 중심을 잃어버린 진보정당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만든 정당에 노동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진보정당을 표방하거나 진보세력에 뿌리를 둔 정당이 있기는 하지만 존재감이 없습니다. 언론으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돼 버렸는지는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철저한 반성과 거듭남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도 희망은 진보정치입니다. 진보는 우리 사회의 가장 왼편, 소외되고 가난하며 억눌린 자와 함께합니다. 그래서 진보는 실업자·비정규 노동자·노점상·장애인·소수자, 많은 걸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청년들과 함께합니다. 진보는 모든 금기에 도전하며, 미래를 지향합니다. 진보는 가장 원칙적이기에 급진적입니다. 진보는 사회주의 생활공동체를 꿈꾸며 평등세상을 실천합니다. 모든 전쟁과 폭력을 거부하며 평화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래서 진보는 가장 아름답습니다. 이 아름다움이 결국은 인류를 구원할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 믿음 위에 진보정치가 있습니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presiden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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