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말로는 만리장성 못 쌓을까.”

선거 시기 공약들이 대부분 이런 것 같다. 기존과 비슷한 정책을 내놓고도 내가 하면 다르다고 우기고, 과거 실패 사례나 안 되는 이유를 객관적으로 분석하지도 않고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된 공약을 내지르고 본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6일 발표한 가계부채 대책이 그렇다. 그는 가계부채가 급증한 원인을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정책 실패에서 찾았다.

“부동산 경기부양을 위해 '빚내서 집 사라'고 재촉했다. 각종 부동산·금융 규제를 완화했다. 부동산 띄우기도 경기 살리기도 실패하고 가계부채만 폭증했다. 정부의 정책 실패를 국민이 고스란히 감당하고 있는 게 바로 가계부채다.”

그런데 부동산 정책과 관련해서 가장 실패한 사례 중 하나가 그가 청와대 실세 수석으로 있었던 노무현 정부다. 김대중 정권 말기부터 노무현 정권 내내 상승한 수도권 아파트 가격은 그야말로 ‘역대급’이었다. 2001~2007년 서울 아파트 가격은 2.4배 상승했다. 더군다나 노무현 정부는 출범부터 퇴임 직전까지 부동산 투기 억제를 매우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정부가 부동산시장을 이기지 못한다는 ‘부동산 불패 신화’까지 확인시켜 줬다. 서민들이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시 경험이 미친 영향이 크다. 요컨대 이명박·박근혜의 부동산 부양정책이 통할 수 있었던 건 노무현 정부 시절 부동산 급등이 중요한 배경이란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부동산 가격폭등은 여러 이유가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미국과 유럽의 부동산시장 급등에 영향을 받았고, 외환위기 관리체제 종식 후 시작된 정부의 경기부양 정책과 넉넉해진 시장 자금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부동산 폭등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정부 정책이었다.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당시 정부는 개혁적 발언과는 반대로 현실에서는 일관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노무현 정부가 담보대출 규제(DTI)부터 종합부동산세, 재건축 개발이익 환수제 등 수많은 부동산 규제 정책을 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투기자금이 유통되는 금융시장에서의 규제 해제도 동시에 추진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금융허브론부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금융시장 규제를 해제했다. 2007~2009년 세계 금융위기 원인이기도 한 '규제 없는 자본시장'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 중 핵심이다.

주식이나 채권 같은 증권을 거래하는 자본시장은 자산이 가져올 미래 수익에 대한 ‘기대’를 거래한다. 예로 한 기업의 주식 가격은 그 기업의 미래 수익과 배당에 대한 기대를 표현한다. 채권 역시 미래 금리에 대한 기대가 거래가격의 기준이 된다. 부동산 역시 가격이 정해지는 원리는 같다. 아파트를 임대할 경우 얻을 수 있다고 기대되는 미래 수익의 현재 가치가 가격이 된다. 자본시장과 부동산시장은 둘 다 미래에 대한 주관적 기대로 가격이 만들어지는 시장이다. 기대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만큼 기대를 키우고 떨어뜨리는 투기적 행태가 시장을 움직이는 근본 동력이다. 자본시장 규제를 풀어 주면서, 부동산시장만 규제한다는 당시 정부 정책의 논리가 이상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전 대표는 가계부채 대책을 발표하면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성장론을 부채 주도 성장으로 규정하고 자신은 소득 주도 성장을 통해 국가경제를 살리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전 정권들도 부채를 좋아해서 가계부채를 늘린 것은 아니다. 자산을 다루는 자본시장이나 부동산시장은 원초적으로 부채를 필요로 한다. 어떤 점에서 그 자체가 부채의 연쇄사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산 가격이 상승한다는 것 자체가 채무로 인한 이자 부담보다 자산으로 인한 수입이 많을 것이라는 기대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부채를 내서 자산을 구매하는 건 자본시장의 속성이다. 그래서 자산 가격이 오르면 부채가 증가하고, 부채로 자산을 더 구매하면 그만큼 자산 가격이 또 오른다. 자본시장을 자유롭게 풀어 두면 이 부채의 연쇄사슬이 훨씬 다양한 금융상품을 통해 복잡하고 거대하게 만들어진다. 물론 그러다 어느 순간 부채의 사슬이 지불의 사슬로 뒤바뀌며 금융시장이 연쇄 부도를 맞기도 한다. 2008년이 그랬다.

그동안 이뤄진 금융시장 규제 해제에 대한 반성 없이 부채 주도 성장을 소득 주도 성장으로 뒤집겠다는 것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그다지 진정성 있는 것도 아니란 말이다.

문 전 대표의 가계부채 대책은 없는 사람들 빚을 옥죄어 금융시장 혼란을 막겠다는 ‘가진 자’들을 위한 부채관리에 불과해 보인다. 그는 ‘가계부채총량관리제’를 통해 가계부채가 더 늘지 않도록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빚을 줄여야 하는 채무자는 담보가 튼튼한 부자보다는 가진 자산이 별로 없는 빈곤한 가계일 수밖에 없다. 그의 구체적 정책도 저소득 가계의 대출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다.

저신용자 대출을 관리해 은행신용 전체의 건전성을 높이겠다는 것으로, 부자들은 금융시장 리스크가 줄어 좋겠지만 없는 사람들은 뭘 어떻게 살아가라는 것인지 답을 찾을 수 없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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