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친척 어르신들과 저녁식사를 하다 보면 자주 나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1960년대 밀가루 포대 이야기다. 60년대는 언제나 배가 고픈 시기로 기억되는데, 그 배고픔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바로 미군이 원조한 밀로 만든 밀가루 포대다. 밀가루 한 포대면 온 가족이 며칠을 먹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 포대였겠는가.

재미난 건 그 포대에 대한 설명이다. 한 친척분은 그 밀가루 포대를 미국 성조기로 회상했다. 아무리 오래돼도 정확히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당시 밀가루 포대에는 성조기를 배경으로 두 사람이 악수하는 마크와 “미국 국민이 기증한 밀로 제분된 밀가루”라는 설명이 큼직하게 찍혀 있었다. 놀랍게도 50년도 넘은 기억이 꽤 정확하다.

60년대 학생시절을 보낸 그분들에게 미국 성조기는 지금도 굶주림을 채워 준 밀가루 포대와 크게 다른 의미가 아닐 것이다.

얼마 전에는 그 친척분들이 함께 필리핀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한 분의 여행후기는 이랬다. “60년대에 필리핀이 장충체육관을 지어 줬는데, 이제는 우리가 도와준다.” 이 말은 사실관계에 어긋난 것이긴 하다. 장충체육관은 서울시 자금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도 같은 말을 했을 정도로, 당대 국민이 공유하는 오해다. 60년대 필리핀에는 한국을 지원한 미국 초국적기업들의 아시아사무소가 위치해 있었고, 일본을 제외하면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선두주자였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어쨌거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70년대 중반 이후 두 나라 경제 상황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필리핀은 그 유명한 마르코스 독재 기간을 거치면서 경제가 퇴보해 2005년이 돼서야 30년 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회복했다. 자그마치 30년간 조그만 성장도 하지 못한 것이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계속 성장했고, 65년 필리핀과 비슷했던 1인당 GDP가 2015년에는 필리핀보다 10배 커졌다.

성장의 기적을 직접 체험한 그 친척분은 필리핀에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만약 우리나라 대통령이 박정희가 아니라 마르코스였으면 어떻게 됐겠느냐?” 아마도 필리핀 여행을 하는 많은 한국 어르신들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기적 같은 성장을 경험한 그 시대 사람들에게 박정희란 이 성장의 기적과 다르지 않다.

내 생각에 탄핵기각 집회 참여자들이 뜬금없이 성조기를 들고나오고, 박정희 코스프레를 하는 이유는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박근혜는, 그녀가 무엇을 했건 간에, 그들에게 배고픔을 잊게 해 주고 자랑스러운 경제성장 기적을 일군 60~70년대를 대표한다. 그래서 박근혜 탄핵을 이 세대의 부정으로 인식하며 그 시대의 상징들, 60년대 배고픔을 달래 준 미국 성조기와 70년대 성장을 이끈 박정희(코스프레 분장부터 군복까지)를 들고나오는 것 같다. 탄핵기각을 외치며 울분에 찬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박근혜 탄핵을 ‘세대’의 부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탄핵기각 집회에 뜬금없이 등장한 성조기와 박정희가 그것을 방증한다.

최근 조중동 보수언론은 “다음 정부에서 들 촛불을 준비하겠다(조선일보), 차기 대통령은 박근혜보다 더 불쌍하게 끌려 내려올 것이다(중앙일보)”는 과격한 사설과 칼럼을 심심치 않게 내보낸다. 박근혜를 버려 보수정권을 재창출하려 했던 원래 포부가 모두 무위로 돌아가자, 아예 차기 정부를 무너뜨리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또한 탄핵기각 집회에 참석하는 열혈 보수세력을 다음 정권의 반정부 시위대로 미리 준비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의 뉴라이트처럼 말이다.

이제 탄핵기각 집회에 대한 비난보다도 그 집회의 영향력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비판이 필요한 시기다. 그리고 효과적인 비판을 위해 개혁세력으로 통칭되는 지식인들이 만든 기존 프레임을 재검토할 시점이도 하다. 예로 산업화 세대·민주화 세대, 친미·반미 등의 프레임이 그렇다. 개혁정권이든 보수정권이든 80년대 이래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일관되게 추진했고, 미국이 주도하는 금융세계화와 군사패권에 동참했다. 그리고 서민들은 고통을 받았다. 위와 같은 비판 프레임은 개혁정당과 보수정당이 서로 패를 나누기에는 효과적이나 서민의 고통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노동으로 나라를 성장시켰으나 여전히 이 땅에서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권리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민중을 단결시켜야 할 때다. 진보적 사회운동은 실제 삶의 갈등을 반영하지 못하는 대결구도를 재편해야 한다. 물론 이는 정권교체를 훨씬 뛰어넘는 과제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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