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촛불민심이 노조에 준 교훈은 노조 조직력을 확대하고 산별노조운동의 내용적 완성도를 높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대선이 있죠. 하지만 특정 정당을 지지하고, 특정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노조의 모든 역량을 쏟아서는 안 됩니다. 한국형 산별교섭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유지현(49·사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의 말이다. 산별중앙교섭을 대하는 유 위원장의 마음은 복잡다단하다. 노조는 1998년 국내 최초 산별노조로 출범해 2004년 산별중앙교섭을 시작했다. 심드렁한 병원 사용자들을 교섭장으로 이끌어 내 '대화와 투쟁'이라는 양면전술을 번갈아 사용했다. 2007년 교섭에서 임금인상분 1.5%를 비정규직 문제해결에 사용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323억원을 투입해 비정규직 2천4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당시 비정규직 4천여명의 처우를 개선했다. 이른바 ‘아름다운 합의’로 알려진 당시 교섭은 산별교섭 중요성과 가능성을 노동계 안팎에 확인시켰다. 지난해에도 노사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임금인상분을 사용하고 비정규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노조는 올해로 열세 돌을 맞은 산별중앙교섭에서 내실을 다지겠다는 구상이다. 한계는 분명하다. 의료기관의 90%가 민간에 쏠린 상황에서 대형병원인 국·사립대병원과 민간 중소병원이 교섭에 나서지 않고 있다. 지난해 교섭에는 국립중앙의료원·경기도의료원을 비롯한 공공·특수목적병원·지방의료원 42곳이 참여했다. 산별교섭 법제화와 단체협약 효력확대라는 제도적 뒷받침이 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보건의료 노사교섭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교섭 때 쟁점으로 떠오르는 인력확충과 비정규직 확대 금지 같은 내용을 업계 전반으로 확산하려면 제도적 뒷받침과 더불어 교섭에 참여하는 민간 대형병원이 늘어나야 한다.

<매일노동뉴스>는 지난달 27일 유지현 위원장을 서울 영등포구 노조 회의실에서 만나 올해 산별교섭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한국형 산별교섭 모델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내실을 다져 온 만큼 올해 교섭에서는 한 단계 도약하는 성과를 내겠다고도 밝혔다.

유 위원장은 “내년은 보건의료노조가 산별노조로 출범한 지 20주년 되는 해”라며 “제2의 산별노조운동이라고 할 정도로 내용에서 완성된 모습을 보이겠다”고 말했다.

“한국형 산별노조 모델 만들겠다”

- 산별교섭으로 어떤 성과를 거뒀나.

“기업별교섭에서 상상할 수 없는 성과를 낸 건 분명하다. 의료산업이 워낙 민간에 쏠려 있다 보니 교섭으로 해결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질 좋은 의료서비스는 결국 정책적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다. 지난해 두 차례 노사공동포럼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보건의료 분야 정책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사가 공동으로 나서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노사가 각을 세우고 갈지, 공감대를 만들어 공동 입장으로 정부에 제안할지를 정해야 한다. 병원비 없는 병원, 간병인 필요 없는 병원 말이다. 예전에 요구할 때는 너무 먼 얘기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요구가 됐다.”

- 산별노조운동, 어떤 점이 어려운가.

“20년 전에 산별노조 하면 노조가 노동시장에 개입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되는 줄 알았다. 그 정도로 기대가 컸다. 노사관계가 대립적인 상황에서 쉽지 않더라. 정부와 사용자는 산별교섭을 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금기시했다. 법과 제도적으로 뒷받침이 됐다면 좋았을 텐데. 어떻게 하면 노조가 생각하는 정책들을 산업 의제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올해는 한국 상황에 맞는 한국형 산별노조운동을 만들 계획이다. 더 좋은 일터와 노동환경을 만들기 위해 한국에서 산별노조가 가야 할 길과 맞춤의 조직 형식을 찾을 것이다. 발전전략을 찾기 위해 연구원도 설립했고 토론회도 준비 중이다. 다른 산별노조에도 같이하자고 제안할 것이다.”

“보건의료에서만 50만개 일자리 만들 수 있다”

- 올해도 노조 핵심 요구는 인력확충인가.

“그렇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 이후 의료전달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인력을 획기적으로 늘리지 않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는 거나 다름없다. 간호사면허증 가진 간호사 중 절반도 일을 안 한다. 신규 간호사들은 노동강도가 높아 못 버티고 떠난다. 잡을 수도 없다. 인력이 획기적으로 늘어야 퇴직률을 낮출 수 있고 교대근무제도 개선할 수 있다. 인력이 들어와야 비로소 직장문화를 개선할 수 있다. 2020년부터 간호·간병통합서비스가 전면 시행된다. 간병인 없는 병원, 병원 내 감염 없는 병원을 위한 인력충원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다.”

- 대선 정책요구안으로 보건의료산업 일자리 50만개를 요구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단순한 구호로 50만개를 요구한 게 아니다. 비현실적인 요구도 아니다. 노조는 수년 동안 전문가들과 함께 보건의료산업에 필요한 적정인력을 연구했다. 간호·간병통합서비스 전면 시행으로 보호자 없는 병원을 만들려면 11만명이 필요하다. 병원의 의료서비스 질을 높이기 위해 12만명이 필요하다. 예방의료체계 구축을 위해 보건소·학교·산업에 필요한 인력만 10만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으로 6만여명의 의사가 늘어나야 한다. 환자안전법 시행에 따라 필요한 전담인력은 3천명이다. 이 중 하나라도 국민건강과 관련 없는 일자리가 없다. 바꿔 말하면 우리나라가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려면 50만명을 충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정부는 의료기관에 필요한 인력실태를 조사하고, 국회는 인력확보를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하는 내용의 보건의료인력지원법 제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대선에서 보건의료 의제 후순위 안 돼”

- 보건의료인력지원법 제정안에 대한 정치권의 논의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사그라든 것 같은데.

“정부와 여야 정치권 그리고 학계까지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는데 게이트로 밀려나 버렸다. 더 이상 후순위로 밀려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든다. 3월, 늦어도 6월 임시국회에서 제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할 계획이다. 벌써 정치권은 대선 국면인데 보건의료 의제들이 뒤로 빠져 있는 것 같다. 대선주자들도 보건의료 공약을 내놓지 않았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요구하는 촛불정국에서 보건의료 문제가 뒤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 이번 게이트를 꿰고 있는 건 의료민영화와 규제완화다. 노조는 지난달 대의원대회에서 50대 요구안을 확정했다. 각 캠프에 요구안을 전달하고 의견을 물을 예정이다.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대선방침을 정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이번 대선은 의제 중심으로 펼쳐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차기 대통령에게 필요한 리더십을 꼽는다면.

“동반자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노조가 요구하니까, 노조를 시혜적 대상으로 보고 '해 줄게' 해서는 안 된다. 보건의료와 노동 분야 어떤 게 필요한지 같이 논의해야 한다. 현장에 답이 있다. 의료기관에서 간호사와 환자에게 어떤 게 필요한지는 현장 간호사들이 가장 잘 안다. 현장이 빠진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협치가 구현될 수 있도록 노사정협의체 같은 모델을 통해 꾸준히 의견을 모을 때 국민이 요구하는 변화가 가능해진다.”

- 끝으로 청년 간호사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대형병원 기준으로 1년에 신입간호사가 300명씩 들어온다. 학교를 막 졸업한 20대 청년들이다. 병원 조직문화에 적응하는 데 힘들어한다. 업무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협업을 중시한다. 노조는 간호사를 지키는 기둥 역할을 할 것이다. 간호사도 노동자다. 노조를 어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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