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원칙적 해고자운동의 살아 있는 전설. 6번에 걸친 구속에도 불굴의 투지로 빛나는 전해투의 역사적 증인. 전국플랜트건설노조 충남지부 노동안전국장 강성철.

강성철은 무안에서 태어나 9세부터 함평에서 자랐다. 세 살 무렵 어머니가 별세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정규중학교 대신 재건중학교를 다녀야 할 정도로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다. 15세 때 광주 아세아자동차 정비학원에서 정비기술을 배워 1979년 말 10대 중반 나이에 버스정비회사 노동자가 됐다. 85년까지 공항버스 정비회사인 화곡교통 등에서 일했지만 교통사고를 당해 퇴사했다. 86년부터는 신월콜택시(한남운수 박복규씨가 당시 사장)에 입사했다. 정비노동자에서 새롭게 택시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88년 범한택시에서 노조결성의 기쁨을 맛봤지만 노조가입 사실을 확인한 사장은 "넌 옛날 같으면 워커발로 밟아 죽였어"라는 막말을 했다. 노조파괴에 맞서면서 진정한 노동자로 거듭났다. 89년 5·18 행사와 투쟁 때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노동운동이 택시판에서만 다섯 번의 해고로 이어졌다. 블랙리스트로 인한 결과였다.

93년부터 활동을 본격화한 전해투와는 94년 후원회원으로 인연을 맺었다. 삼보컴퓨터와 한화오트론 투쟁에 연대하면서 "투쟁하시면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개인적 약속을 했다. 98년 가을 남성흥진에서 해고된 후 전해투 상황실을 찾았을 때는 "떨려서 사무실 문을 제대로 못 열었다"고 했다.

그렇게 99년부터 전해투에서 활동을 시작해 10여년간 전국 해고자투쟁의 중심에 섰다. 해고자투쟁만이 아니라 장애인 투쟁과 노학연대투쟁까지 활동 폭을 넓히던 중 2000년 11월14일 구속을 당했다. 처음 끌려간 곳이 박종철 열사가 취조받던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고초를 이겨 낸 끝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출소 3개월이 지난 2001년 7월 한화오트론 연대투쟁으로 두 번째 구속을 당해 1년6개월을 감옥에서 살았다. 필자와는 2003년 출소 뒤 발전노조의 중앙노동위원회 항의투쟁에서 인연을 맺었다.

노동자들에게는 한없이 친절하고 싹싹했지만 경찰들에게는 분노의 돌격을 감행하는 전해투 간부였다. 투쟁 현장에서 단호한 만큼 경찰의 표적이 됐고, 한성여객투쟁으로 3차 구속돼 1년6월의 형을 살았다. 2004년 경찰청 항의 민주노총 결의대회에서 네 번째 구속돼 다시 1년6월을 살았다. 당시에는 밖에서 활동하는 기간보다 감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노동자였다.

2006년 2월17일 전해투 총회에서 필자가 위원장으로, 강성철은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어느 곳에 가든지 동지들을 따뜻하게 품었다. 반면 경찰과 사측에는 서늘하고 단호했던 탓에 필자의 고심이 컸다.

효성해복투의 본사 상경 선전전에서 제지하는 경찰과 실랑이가 붙었던 적이 있었다. 온몸을 날리며 경찰들을 막아 내던 그에게 전해투 위원장이 가격을 당하는 사달이 났다. 이때 필자가 “쟤들한테 그래야지 위원장을 패면 어떡합니까?”라며 큰소리로 외쳤고, 현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본사 진입을 막던 경찰과 노동자들이 잠시 웃느라 휴전상태가 됐던 기억이 새롭다.

강성철 집행위원장은 비정규악법과 노사관계 로드맵 입법 저지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하던 2006년 9월11일 노사정 야합을 규탄하며 같은달 19일 한국노총 7층 임원실을 점거했다. 한국노총 소속 노조에서 해고된 노동자를 포함한 8명의 전해투 회원들은 임원실에서 베란다로 밀려난 상황에서도 노사정 야합을 규탄하며 비정규직 개악안과 노사관계 로드맵 분쇄를 주장했다.

점거 당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양대 노총 공조파기 선언이 나왔다. 이 투쟁으로 8명 전원이 구속됐다. 강성철로서는 다섯 번째 구속이었다. 구치소에서는 수용자들의 인권과 처우 향상을 위해 70여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가 구치소에 들어가면 교도관들이 전전긍긍하곤 했다. 다시 감옥에서 1년6월을 살다가 2008년 4월 출소했다. 더 이상 그를 감옥에 보내면 안 되겠다는 판단에 따라 전해투 활동을 잠시 쉬게 하면서 구속노동자후원회 상근활동을 하도록 했다. 구속자 면회와 뒷바라지를 하면서 투쟁 현장에 덜 가도록 하자는 조직적 취지였다.

하지만 강성철은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에서 연행된 구속노동자후원회 활동가를 면회하는 과정에서 여섯 번째로 구속됐다. 8개월의 옥살이를 하고 나왔다. 이번에는 해고자투쟁이 아닌 현장으로 들어가도록 강권했다.

2012년 전해투 위원장을 다시 맡은 필자와 막걸리로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 충남의 건설플랜트에 일자리가 생겼다는 통보를 받았다. 필자가 더 기뻤다.

“이젠 제발 구속되지 말고 현장노동자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세요.”

떠나는 그에게 차비를 손에 쥐어 주며 신신당부를 했다. 2012년 1월13일 충남으로 간 강성철은 5년 동안 플랜트 노동자로 일하며 노동안전 활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전국플랜트건설노조 충남지부에서 노동안전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의 투쟁과 수감생활로 인해 돌아가신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늘 회한인 노동자. 자본천국 노동지옥으로 불리는 이 땅의 해고자들이 원직복직 투쟁을 하는 곳이면 불원천리 달려갔던 전해투 집행위원장. 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꿈꾸는 전해투의 전설. 그의 건승을 기원한다.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hdlee20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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