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2004년 봄 유럽출장 때다. 긴 비행과 자투리 시간에 읽을 책으로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의 <시장으로 가는 길>을 갖고 갔다. 경제학자의 책이니, 그것도 번역서라 쉽게 속도가 나질 않았다. 급하게 번역해 비문(非文)과 오자도 간간이 보였지만 책은 유익했다. 함께 간 KBS 프로듀서가 파리에서 “뭐 이런 책을 읽느냐”고 힐난하면서 책을 집어 훑어보더니 깜짝 놀라했다. 책 제목만 보고 <경마장 가는 길> 같은 시간 때우는 소설책인 줄 알았단다.

노무현 대통령이 저자 스티글리츠 교수를 대통령 경제자문으로 모시려 했다는 이유로 읽기 시작한 책이다. 온통 사민주의와 점진적 개혁으로 가득 찼지만 전문가의 내공이 깃든 탄탄한 책이었다. 당시 스티글리츠 교수가 대통령 경제자문이 되지 못한 이유는 보수언론의 공격 때문이었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교수를 좌파로 몰아 좌초시킨 셈이었다. 하긴 이장희 교수와 최장집 교수도 좌파로 몰았던 우리 언론의 수준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기회 있을 때마다 과격하진 않지만 의미 있는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지난 13일 열린 ‘월드거버먼트서밋’ 포럼에서 “화장실이 페이스북보다 더 중요한 발명”(중앙일보 15일자 경제섹션 6면)이라고 평가했다. 페이스북을 ‘광고 엔진’으로 진단한 그의 지적은 옳다. 그는 “페이스북 같은 더 나은 광고 엔진을 갖는 건 광고업에선 중요한 일이겠지만 우리 생활 수준을 본질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고 덧붙였다. ‘전기’는 인간 삶을 근본부터 바꿔 놓은 발명이지만, 페이스북 같은 디지털 혁신이 삶에 변화를 미치는 영향력은 크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디지털 혁신은 인간의 삶을 부정적으로 바꿀 가능성이 더 높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사연을 들어 보자. 내가 아는 현대차 노동자 한 사람은 “10년 전엔 회사가 야간조 작업 때 책 읽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은 공장 안에 와이파이(WIFI)를 빵빵하게 깔아 줬다”고 했다. 자동화로 작업 틈틈이 책 읽을 여유가 생겼는데도 회사는 굳이 노동자들이 책을 못 읽게 했다. 노동자의 사상을 가지는 게 회사에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그런데 요즘 공장 안 정규직들은 대부분 스마트폰에 머리를 파묻고 일한다. 울산공장에서 서울의 촛불집회 소식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단다.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바로 옆 동료와의 대화나 소통이 그만큼 줄었다. 심지어 동료가 과로사를 해도 모른다.

10년 전 출근시간대 서울지하철 안에선 무가지라도 읽었지만, 이젠 전 국민이 게임 삼매경이다. 전 국민이 스마트폰으로 고스톱을 치는 퇴근길 전동차 안에 우리의 미래가 있을까. 이처럼 IT 노예를 대거 만들어 내는 사회구조의 밑바탕엔 철저하게 ‘이윤’이 도사리고 있다. 자본도 노동도 모두 이윤에 매몰되다 보니 이를 혁파하기 위해 ‘이윤보다 인간을’이란 사회운동단체도 등장했다. 나는 그 단체의 약칭을 ‘이윤’이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다. ‘인간’이란 약칭이 더 낫지 않을까.

충남 예산읍 한 아파트 주민들이 관리비 절감명목으로 관리사무소 직원을 해고하려 한 입주자대표들을 해임시킨 게 화제다. 이 아파트 입주자대표들은 경력이 많아 임금을 많이 줘야 하는 직원을 해고하려고 했다. 입주민들은 관리사무소 직원 해고가 부당하다며 오히려 입주자대표들을 상대로 불신임 투표를 했다. 투표 결과 찬성 128표, 반대 21표로 입주자대표들을 해임했다. 한국일보는 15일자 14면에 “돈보다 사람”이란 제목으로 이를 눈길을 끄는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사실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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