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고향인 봉하마을에 도착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꺼낸 첫 일성이 "야, 기분 좋다"였던가. 김동만(58·사진) 전 한국노총 위원장이 3년 임기를 마치고 꺼낸 첫말은 "야, 노동해방이다"였다. 임기 내 박근혜 정부와 지긋지긋하게 싸웠던 김 전 위원장이었다. '노동해방'이라는 말보다 더 정확한 심경표현은 없을 터.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회관 7층 위원장실에서 만난 김 전 위원장의 표정은 더없이 후련해 보였다. 하지만 진정한 노동해방은 아직 멀었다고 해야 할까. 김 전 위원장은 이날 한국노총 상임지도위원으로 위촉됐다.

"세월불거 시절여류"

- 방을 싹 치웠다.

"오늘부터 법적으로 (김주영 집행부) 임기가 시작되는 날이니까."

한국노총은 규약상 임원 임기는 당선 후 1주일 뒤부터 시작된다. 장석춘 전 위원장 시절인 2009년 2월 규약을 개정했다. 개정 전에는 정기대의원대회가 임원 임기의 시작이었다.

"예전에 장석춘 위원장이 성격이 좀 급하셨던 것 같다. 통상 정기대의원대회에서 구집행부가 결산까지 끝내고 방망이(의사봉)와 깃발을 (신집행부에) 전달하면 그때부터 임기를 시작했는데, 장 위원장이 당선되고 대의원대회까지 한 달간 심심하셨던가 보다.(웃음) 이듬해 규약을 '정기선거인대회일로부터 7일째 되는 날'로 고쳤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위원장과 사무총장은 사라지는데 부위원장들은 남아있게 되는 모순이 생긴다. 그래서 다시 규약을 고칠까 했는데, 오해가 있을까 봐 못 고쳤다."

- 무슨 오해 말씀인가.

"자기가 선거에서 떨어지면 한 달 더 있으려고 하나, 이런 곡해가 있을까 봐 그냥 놔뒀다.(웃음)"

- 1주일 만에 밀려나는 느낌인가.

"무슨 소리. 김주영 위원장은 임원선거에 세 번째 나왔기 때문에 공부도 많이 했고, 배전분할 반대투쟁에서 이긴 적도 있어 충분한 역량이 있다고 봤다. 김만재 위원장은 패기가 넘친다. 그런 넘치는 패기가 조직 활성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봤다. 누가 되든 노총을 잘 이끌어 갈 수 있겠다고 판단했고, 후배들이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서운함이나 아쉬움은 전혀 없다."

- 임기를 마친 소감은.

"세월불거 시절여류(歲月不居 時節如流)라고 하잖나. 세월이 정말 빨리 흘러갔다. 박근혜 정부랑 싸우느라 별로 해 놓은 게 없어 아쉽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밖에 있었으면 손잡고 여러 일을 했을 텐데 아쉽다. 한편으로 한상균 위원장은 감옥에서 저렇게 고생하는데, 나는 이렇게 편안하게 있다가 임기를 마치는 입장이라 미안한 마음이 든다. 정권교체가 되면 특별사면을 받아 나올 거라고 확신한다. (한 위원장이) 나오면 맛있는 거 많이 사 주려고 한다."

"양심과 정의 팔지 않았다"

- 임기 동안 가장 아쉬웠던 점은.

"임기 1년차에 정부가 공공기관 복지를 줄이겠다고 했다. 신승철 전 민주노총 위원장과 내가 양대 노총 공공부문노조 공동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그때 죽기 살기로 싸웠으면 정부가 성과연봉제까지 들고나오지는 못했을 거다. 복지 하나 건드렸는데 다 무너지니까 정부에서는 '야, 이거 성과연봉제까지 아무 문제 없겠구나' 생각했던 거 같다. 중공군이 임진각까지 밀고 내려오듯 복지부터 임금피크제, 성과연봉제까지 쭉쭉 밀려 내려왔다. 애초에 낙동강 방어선을 정확히 쳤어야 했는데…. 교섭권을 위임해 주면 양대 노총 위원장들이 총대를 메겠다고 했는데 (단위노조에서) 거기까지 결의를 못했다. 각자도생하면서 쉽게 넘어진 부분이 참 아쉽다."

- 2015년 9·15 노사정 합의로 곤욕을 치렀는데.

"우리는 양심을 팔지도, 정의를 팔지도 않았다. 순수하게 청년일자리를 해결해 보려고 시작한 노사정 논의였다. 예전에는 무슨 합의를 하면 정부가 지원을 해 줬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걸 핑계로 합의하지도, 지원을 받지도 않았다. 당시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노총이 합의하면 타임오프 관련해서 임금 못 받은 사람들 우리가 지원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했는데, 그런 얘기는 하지도 말라고 했다. 논의의 순수성을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합의문을 보라. 두 개(일반해고·취업규칙)지침? 합의된 바 없다. 임금체계 개편은 노사가 자율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비정규직(파견·기간제) 관련해선 노사정이 공동실태조사를 한 뒤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그런데 마치 다 합의된 것처럼 갑자기 2대 지침 내려보내고, 성과연봉제의 '성'자도 안 나왔는데 성과연봉제 들이밀고, 정신이 나간 것처럼 난리를 쳤다. 현기환·안종범·최경환·이기권…. 최소한의 상식은 있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왜 그렇게 태풍처럼 몰아세우고, 한국노총에 똥바가지를 씌워 놓고,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았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완전 사기꾼 정권이다."

▲ 정기훈 기자


- 당시 정부로부터 압박을 많이 받았는데.

"2015년 4월8일 노사정 대화 결렬을 선언한 다음부터 사정대상에 오른 것 같다. 일부 산별 대표자들도 사찰을 당하고 그랬다. 옛날 유신시대 때 노동계를 빨갱이로 바라보던 시각 그대로 우리를 대했다. 아직도 잔존세력이 남아 검찰과 국가정보원을 동원해 노동계를 죽이려고 한다. 정권이 바뀌면 발본색원해야 한다."

- 보람되거나 좋았던 일은 없었나.

"일본 땅에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세운 게 기억에 남는다.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을 할 때부터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일제 침략기에 처참한 삶을 강요받았던 선배 노동자들의 원한을 조금이라도 풀어 드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달래는 역할을 한 것 같아 보람을 느꼈다. 사할린에서도 이름 모를 노동자들이 정말 많이 돌아가셨는데, 거기에도 노동자상을 세웠으면 좋겠다."

"7분 만에 정권 퇴진 결의, 한국노총 저력 확인"

한국노총은 지난해 11월3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박근혜 정권 퇴진"을 결의하고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에 참여했다. 김동만 전 한국노총 위원장은 중앙집행위 결의에 앞서 같은해 10월26일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 앞에서 열린 '전국 동시다발 노동부 규탄 결의대회'에서 "박근혜 정권 퇴진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선언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한국노총이 '정권 퇴진'을 언급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박근혜 정부 퇴진투쟁에 적극 결합하고 있는데.

"노동부 규탄 결의대회를 하러 세종시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정권 퇴진 선언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전체 산별과 지역본부가 (정권퇴진 선언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할 수도 있겠지만 치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봤다. 실제 노동부 앞에서 정권 퇴진을 선언하고 항의 문자메시지를 많이 받았다. 혹시나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닌가 싶어 10월29일 첫 번째 촛불집회에 나가 봤다. 거기에서 '야, 내가 잘한 거구나' 확인을 받았다. 촛불이 횃불이 되는 건 시간문제구나 싶더라. 그러면서도 11월3일 중앙집행위를 앞두고 걱정을 많이 했다. 박근혜 퇴진 시국선언을 한다고 언론들 불러다 놓고 우리끼리 갑론을박하다가 망신만 당하면 어떡하나, 그 전날 잠을 못 잤다. 다행히 7분 만에 가결되는 걸 보면서 한국노총의 저력을 확인했다. 지역 의장들과 산별 대표자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 <정기훈 기자>

- 조기 대선이 예상된다.

"정권교체 과정에서 한국노총이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한국노총에는 다양한 정치적 이념과 정체성이 존재한다. 과거에는 지역별로 지지후보를 선언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노동을 이해하고 노동계와 협력할 수 있는 정권을 창출해야 한다."

- 어떤 대통령을 바라나.

"헌법을 준수하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려 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할 수 있는 대통령 말이다."

- 김주영 집행부에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노총의 명운은 조직 확대에 달려 있다. 지금 이 인원으로는 안 된다. 정규직 중심 운동은 노동운동이 아니라 죽는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과 청년학생, 시니어 모두를 끌어안고 가야 한다. 또 한국노총 재정이 열악해 간부들의 라이프사이클에 맞는 임금을 못 주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재정을 탄탄히 해서 인재도 육성하고 조직도 확대했으면 좋겠다."

- 향후 거취는.

"한국노총 조합원으로서 정권교체에 일조할 방법을 찾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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