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경 공인노무사(돌꽃노동법률사무소)

어떤 기록은 쉽게 써질 수 없다. 인간이 겪어서는 안 될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필자에게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병을 얻어 투병 중이거나 사망한 노동자들, 그리고 유가족들과 지난해 진행한 아주 긴 인터뷰가 그러했다. 하루에 여러 곳의 지방을 오가며 마주한 30여명의 피해자와 가족들, 그들은 절규에 가까운 ‘증언’을 쏟아 냈다.

반올림에 제보된 사례만 봐도 230명이 넘는 삼성전자 반도체·LCD 공장 노동자들이 희귀병을 얻었고 이들 중 78명이 사망했다. 석 달간 피해자들을 만나며 삼성이 단기간에 ‘세계 최고 반도체 강국’을 건설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을 철저히 인간이 아닌 기계로 ‘취급’했었는지 책과 영화를 통해서만 짐작했던 적나라한 실상을 접하게 됐다.

“아무도 그곳이 그렇게 위험한 곳인지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필자가 만난 노동자들은 사는 곳이 모두 달랐지만 입사 당시 반도체 공장에 대한 기억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작업자(오퍼레이터)들은 성적이 우수하고 신체가 건강한 지방의 실업계 여고생들이라는 점에서, 삼성맨으로서의 자긍심을 주입하는 연수를 마치고 전문용어부터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한 생산라인에 투입돼 강도 높은 교대제 노동을 묵묵히 버텨 냈다는 점에서 각자의 설명이 정확히 일치했다.

물량이 몰릴 때는 하루 17~20시간을 근무하고 화장실을 오가는 시간마저 자유롭게 허락되지 않아 물 마시는 것조차 참았고, 기계보다 수동이 빠르다며 웨이퍼를 나르는 자동반송기를 아예 끄고 작업에 임하기도 했다. 조별 경쟁은 항상 치열했다. 그렇기에 가스누출 같은 사고가 나더라고 노동자들은 대피보다는 웨이퍼를 챙기는 현장 수습을 먼저 했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래도 대기업인데, 삼성인데’라는 생각이 쉽게 이들의 의심을 지웠다.

무엇보다 그들이 얇은 장갑과 마스크만을 (혹은 이것마저도 없이) 착용한 채 짧게는 1년, 길게는 20여년간 다뤘던 화학물질들은 여전히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만큼 다양하고 불분명하다. 공장에서 일할 당시 두통·피부병·생리불순은 누구나 겪었던 ‘흔한’ 증상이었지만 지금 피해자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는 백혈병을 비롯한 질병들은 그 원인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희소 질환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건강했던 육체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끔찍한 병마와의 싸움 끝에 78명의 노동자들은 목숨을 잃었다.

살아 있음에도 이틀에 한 번씩 투석을 하거나, 5년 넘게 매일 약물과 주사에 의존하거나, 2세에게 닥친 질병의 대물림에 통곡하거나, 무기력한 상태로 언제 어떤 형태로 찾아올지 모르는 몸의 경직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견디기 힘든 형벌처럼 보였다.

영문도 모른 채 자식 또는 남편, 아내·부모를 잃은 남은 자들의 고통은 또 어떠한가. 유난히 아끼던 막내딸의 난소암 투병이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기를 기도하며 고령의 아버지가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아 손수 지었던 깊은 산속의 집. 딸은 끝내 살아서 그 집 문턱을 넘지 못했다. 신부전증에 걸린 가족의 아픔을 차마 지켜보기 힘들어 자신의 신장을 떼어 준 남편과 아버지를 보는 피해자들의 마음은 매일 무너진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이 비극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위험한 작업은 고스란히 협력업체로 이전됐고, 이로써 노동자들은 한층 무방비로 위험에 노출되지만 산재 인정은 그만큼 더 어려워졌다. 삼성은 당국의 비호 아래 아직도 ‘영업비밀’을 앞세워 진실을 가리고 입증 책임은 노동자에게 전가한다.

반올림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시민들과 단체들의 연대 덕분에 많은 피해 사례가 알려졌고 2~3년을 기다린 끝에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에서 산재 인정 사례가 하나둘 추가되고 있다. 그러나 삼성이 이 모든 피해의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문제를 제대로 바로잡기 전까지 비극은 끝날 수 없다.

피해자 유가족을 만나러 가다가 우연히 용인경전철을 탈 기회가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열차 출발점은 황유미씨를 포함해 많은 노동자들이 사망한 죽음의 생산라인이 위치한 기흥, 종착지는 삼성이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불법과 편법 도구로 활용했던 에버랜드였다.

노동자들이 이윤 추구를 지상과제로 삼는 기업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올라타야 했던 탐욕의 열차, 그 종착역에는 죽음에 대한 방관과 은폐 대신 진정한 사죄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궁극의 대책이 반드시 마련돼 있어야 한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