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김영오(49·사진)씨는 지금도 아침까지 뜬눈으로 지새는 날이 많다. 소주를 마시고 잠을 청하는 날이 늘어났다. 유민이 꿈을 꾼 날이면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한참을 울어야 몸을 일으킬 수 있다. 김영오씨 딸 유민이는 2014년 4월16일 세월호에서 목숨을 잃었다. 시신은 참사 발생 8일째 되던 날 김씨의 품으로 돌아왔다. 본명보다 ‘유민 아빠’로 알려진 김씨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2014년 7월14일부터 46일 동안 단식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해 8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단식으로 깡마른 김씨와 유가족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마음 놓고 슬퍼하지도 못했던 시간이었다.

김씨는 올해 2월 돌연 활동을 중단했다. 생활고 때문으로만 알려졌다. 그새 많은 일이 일어났다. 유가족의 단식과 국민 호소로 가까스로 탄생한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은 정부 방해로 지지부진하게 끌어가다 강제로 종료됐다. 그러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국민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섰고, 세월호를 얘기했다. 참사가 나던 그날 대통령의 7시간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탄핵됐고, 헌법재판소는 국회에서 넘어온 탄핵소추안을 심리 중이다. 세월호 7시간이 핵심 쟁점이라고 한다. 김씨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매일노동뉴스>는 20일과 22일 두 차례에 걸쳐 경기도 안산과 서울 마포구에서 김씨를 만났다. 현재 4·16가족협의회를 돕고 있다. 순번이 돌아오면 전남 진도군 동거차도에서 세월호 인양작업을 감시한다. tbs교통방송에서 매주 한 차례 라디오 프로그램 '가슴에 담아 온 작은 목소리'를 진행한다. 김씨는 “촛불로 희망을 보여 준 국민에게 정말 감사하다”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헌법재판소에서 확정될 때까지 촛불을 지켜 달라”고 말했다.

정규직 입사 9개월 만에 부서진 금속노동자의 꿈

 

김씨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26년간 경기도 부천 공사현장과 영세 제조업체에서 일했다. 숙녀복 장사를 했다가 실패해 수천만원의 빚을 지기도 했다. 아내와 이혼한 뒤 비정규직으로 살았다. 인력파견업체 알선으로 전자부품업체에서 일하거나 직접고용 비정규직으로 150만원 안 되는 돈을 받고 다녔다.

2013년 5월 현대·기아자동차 1차 협력사인 명신산업에서 정규직이 됐다. 정규직 일자리는 공장을 전전했던 20여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통장에 350만원가량의 월급이 꽂혔다. 사업 실패로 진 빚을 갚고 양육비를 보내고도 수중에 돈이 남았다. 2014년 5월 초 연휴 때 두 딸과 1박2일 선유도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 야속하게 그날은 오지 않았다. 세월호 침몰과 함께. 4월23일 딸의 시신이 인양되자 5월17일 복직했다. 하지만 곧 사직서를 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진상규명을 하려면 정부와 싸워야 하는데 직장을 다니면서 싸울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세월호는 김씨 가족의 삶을 180도 바꿔 놓았다. 언니가 목숨을 잃은 뒤 둘째 딸은 한 달 동안 학교에 가지 않고 방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 후 딸은 학교에 나가 억척스럽게 공부했다. 하위권이던 성적이 쑥쑥 올랐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전산회계 1급과 2급 자격증을 땄다. 최근에는 A업체 회계팀에 취업했다.

진상규명 활동을 하면서 다시 빚이 쌓이기 시작했다. 생활비와 교통비를 충당해야 했다. 그렇게 빚이 4천만원까지 늘었다. 올해 2월 통장에는 1천700원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후원금을 보내 주겠다고 제안하는 시민들이 많았다”며 “후원금을 받아 진상규명을 위해서만 쓰자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일체 받지 않는 게 유민이한테 떳떳할 것 같아서 거절했다”고 설명했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할퀸 일베의 유언비어

김영오씨가 활동을 잠정중단한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46일 동안 단식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편지를 전달한 일이 생중계되면서 그는 일종의 타깃이 됐다. 보수 성향 인터넷 사이트와 SNS에는 그를 향한 인신공격성 글과 악플이 넘쳐났다.

김씨가 이혼한 후 자녀에게 양육비를 보내지 않고, 비용이 많이 드는 취미생활을 했다는 내용이다. 고인이 된 유민이를 성적으로 희롱하는 댓글이 달렸다. 금속노조 조합원이었다는 이유로 전문시위꾼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유민이 보상금 1억원을 챙겼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2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야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한다는 소문까지 흘러 다녔다. 말도 안 되는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김씨는 “빚을 갚느라 많은 돈을 주지는 못했지만 양육비는 빠뜨리지 않았다”며 “단식을 했다는 이유로 나를 나쁜 아빠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어 “세월호 관련 발언을 계속했으면 아직까지 입에 담지도 못할 악성 루머에 시달렸을 것 같다”고 말했다.

2014년에는 아예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안산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김씨의 형은 동생이 ‘유민 아빠’라는 사실을 숨겼다. 무엇보다 김씨를 괴롭힌 건 유민이에 대한 유언비어였다. 그는 “유민이는 가난한 아빠의 형편을 생각하던 착한 딸이었다”며 “유민이를 가리키며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 나올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참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국가기관의 개입을 의심하고 있다. 유언비어는 그가 단식을 중단하고 병원으로 후송된 2014년 8월23일부터 일제히 쏟아졌다. 최근 공개된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업무일지)도 이 같은 정황을 방증한다. 8월22일자 비망록에 “세월호 유가족(학생 유가족) 외 기타 유가족 요구는 온건 합리적. 이들 입장 반영되도록 중화”라고 적혀 있다. '합리적'인 유가족 요구가 반영되도록 (여론을) 순화하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여론 조작을 의심케 한다. 그는 "입원한 지 하루 만에 나를 음해하는 글들이 보도되고 보수단체는 플래카드를 제작해 집회를 했다"며 "조직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하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7시간은 세월호 비밀의 열쇠
 

▲ 정기훈 기자

김씨는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이 정윤회씨와 있었다고 의심했다. 8월에는 일본을 방문해 세월호 7시간 의혹 보도로 청와대와 소송을 했던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 (기사를) 쓴 거냐고 물었더니 '박근혜 대통령과 정윤회의 열애설과 관련해 일본 증권가에서 찌라시가 돌고 있었고, 조선일보의 첫 보도를 보고 인용보도했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와 관련해 “(가토 기자가) 일본에 들어가자마자 아베 신조 총리를 만났는데, 가토 기자는 '아베 총리가 한국에서 힘들었으니 밥을 먹자고 불렀다'고 했다”며 “단순히 밥을 먹기 위해 만난 것은 아니고 모종의 딜이 있었을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이 올림머리를 하기 위해 미용사를 부른 것과 관저에서 평소처럼 점심을 먹은 것에 대해서도 그는 “더 큰 의혹을 감추기 위한 물타기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이 죽어 가는데 관저에서 집무를 보는 것 자체가 납득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달려오는 게 정상이죠.”

김씨는 대통령이 참사 직후 중대본에 왔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거라고 봤다. 그는 "세월호 선체가 45도에서 50도, 60도 넘어가고 있는데 어느 누구도 탑승자에게 선체에서 뛰어내리라는 지시를 하지 않았다"며 "대통령이 중대본에 있었다면 보고자료를 만드느라 골든타임을 허비하지 않았을 테고, 123정에게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질책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분명한 탄핵 사유”라고도 했다. 김씨는 박영수 특별검사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는 "청와대의 방해로 진상규명에 진전이 없었다"며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7시간이 밝혀지면 세월호 진상규명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탄핵 소식에 차에서 소리 내 울어”

김씨는 요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된 뒤 세월호 진실이 서서히 인양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의원 234명의 찬성으로 가결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차 안에서 소리 내 울었다는 말도 전했다.

그는 "2년8개월 동안 싸우면서 어떤 의혹을 제기해도 정권이나 여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며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느낌이었는데 촛불집회와 탄핵을 보면서 바위가 조금이나마 깨지는 것 같은 희망을 느꼈다"고 말했다.

“2014년과 2015년처럼 촛불이 꺼지고 헌법재판소가 박 대통령 탄핵을 인용하지 않을까 봐 불안해요. 국민이 촛불을 끝까지 꺼뜨리지 않고 지켜 줬으면 좋겠습니다. 대규모 촛불은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참에 대선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공약을 지키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길 바랍니다.”

▲ <정기훈 기자>

“진상 규명돼 유민이 방에서 맘 놓고 우는 게 소원”

김씨는 정치하는 사람들에게서 환멸을 느낀다. 가족협의회 투쟁으로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진상규명법)을 마련하고, 특별조사위원회가 어렵사리 출범했는데,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반대로 흐지부지 활동이 중단되는 모습을 보면서 울분이 쌓였다.

“우리나라에서 정치하는 사람들, 한국 정부가 너무 싫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몰라요. 떡 하나 달라고 하면 되레 떡을 빼앗아 가고 짓밟아 아예 못 먹게 할 정도로 만들지 않습니까? 세월호 유가족은 가슴에 수십 개 대못이 박혀 있어요.”

세월호 참사 986일이 지나도록 그는 방 안에 있는 유민이의 영정사진을 바로 보지 못한다. 그는 “유민이는 틈만 나면 보고 싶다. 유민이가 살아서 돌아오는 꿈을 꾼다”고 말했다.

“3년 가까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해 달라고 길거리에서 지냈습니다. 아직까지 세월호 진실을 10%도 밝히지 못했어요. 1~2년이면 될 줄 알았던 세월호 진상규명이 10년, 20년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영수 특검이 성역 없는 수사를 한다면 그날은 좀 더 빨리 찾아오겠죠. 그날이 오면 며칠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울 겁니다. 아직은 울 때가 아니죠. 그때까지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글=구태우 기자 ktw9@
사진=정기훈 기자




[세월호 참사]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30분께. 전남 진도군 동거차도에서 2.3킬로미터 떨어진 해역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 섬에서 육안으로 선체 일부를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는데도 대다수 탑승객들은 구조되지 못했다. 해상교통의 요지인 이곳은 선박들이 거쳐 가는 곳이어서 ‘거차’라고 불렸는데, 동쪽에 있어 '동거차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월호는 동거차도와 맹골도 사이에 침몰했다. 목적지인 제주도에 닿지 못했다. 탑승자 476명 중 304명이 희생됐다. 세월호에 탑승한 단원고 2학년 325명 중 250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같은 학교 같은 학년 아이들이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었다. 일반인 권재근·권혁규·이영숙씨와 단원고 교사 고창석·양승진씨, 단원고 학생 남현철·박영인·조은화·허다윤양은 아직 차가운 바닷속에 있다. 최근 교육부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에게 2017년 2월 명예졸업증을 주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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