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역 사립대병원인 A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은 하루 평균 11시간을 일한다. 병상수가 800개가 넘는 A병원 간호사들에게 임신과 출산은 산 넘어 산이다. 장시간 노동으로 임신을 하기도 힘든 데다, 출산 이후 아이를 키우기도 어렵다.

병원은 주간(오전 7시30분~오후 3시30분), 이브닝(오후 2시30분~오후 10시30분), 나이트(오후 10시~오전 7시30분)조로 나뉘어 3교대로 운영된다. 간호사들에게 8시간 근무는 다른 나라 이야기다. 병상 환자를 파악하려고 1시간 일찍 출근하고, 인수인계와 나머지 일처리를 하려면 1시간30분 정도 늦게 퇴근할 수밖에 없다.

보건의료노조가 올해 110개 병원에서 근무하는 2만950명의 노동자를 실태조사한 결과 주간 근무자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9.8시간으로 집계됐다. 이브닝 근무자는 9.1시간, 나이트 근무자는 10.9시간을 일했다.

A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이선희(가명)씨는 “주간근무와 이브닝근무를 16번 하는 동안 점심과 저녁을 챙겨 먹은 날이 이틀밖에 안 된다”며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임신 초기에도 유산을 걱정하면서 서서 10시간씩 근무하고, 출산 이후에는 장시간 근무로 아이를 돌볼 수가 없다”며 “8시간만 일하면 좋겠는데 그것도 어려워 차라리 병원을 그만두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일·가정 양립? 병원 그만두는 게 대안”

“어떻게 하면 이직을 줄일 건지 (노사정이) 고민해 줬으면 한다.”

류수영 보건의료노조 한양대의료원지부장이 21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상의에서 열린 ‘병원업종 일·가정 양립 활성화를 위한 유관기관 합동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방청석에 있던 류 지부장은 토론회가 끝날 즈음 일어나 사립대병원 노동실태를 설명했다. 토론회에서 발표된 일·가정 양립 정책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한 것이다.

고용노동부 주최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는 보건복지부·여성가족부·국가인권위원회·보건의료노조·의료산업노련·대한병원협회 등 보건의료산업 노사정이 참석했다. 이들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올해 6월부터 7차례 회의를 열어 일·가정 양립 방안을 모색했다. 회의 결과물로 ‘일·가정 양립 실천 7대 과제’와 병원노동자 모성보호를 위한 방안을 내놓았다.

TF는 △스마트 근로감독 △유휴 간호인력 재취업 지원 △대체인력 지원 △직장어린이집을 대책으로 발표했다. 육아휴직으로 병원 인력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대체인력 채용을 지원하고 유휴인력 재취업을 돕는 내용도 담겨 있다. 민관이 함께 시간선택제 노동자를 빈자리에 알선하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류수영 지부장은 "일·가정 양립의 핵심은 대체인력 확보가 아니라 유능한 인력이 다시 나가지 않도록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대체인력·시간선택제 제안한 노동부

보건의료노조와 의료산업연맹, 병원노동자들은 TF의 대책에 실효성이 있을지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격’이라는 비판도 있다. 병원노동자들은 환자 생명을 다루는 만큼 고도의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노동자들은 대체인력의 경우 전문성이 떨어져 병동에서 환자를 돌볼 수 없고, 병원사업장을 떠난 유휴 간호인력은 노동강도를 이유로 병원에 돌아오려 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유은정 노조 정책국장은 “대체인력 알선 대책은 중소병원이나 요양병원에서는 효과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일정 규모 이상 병원에서는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진기숙 의료산업노련 여성국장은 “인력확충을 요구했지만 병원협회 등이 그런 걸 요구하면 모임(TF)에서 빠지겠다고 해서 충원을 포함한 구체적인 내용이 제외됐다”고 설명했다.

병원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근무를 정착시키고 노동강도와 이직을 줄이는 방안을 요구했다. 이선희씨는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해 하루 8시간 일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며 “노동강도가 줄어야 신입간호사들이 나가지 않고 숙련도를 높이면서 전체 간호사들의 노동강도가 줄어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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