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밤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한 시민이 노동개악 무효라고 적힌 촛불을 들고 있다. 정기훈 기자
▲ 촛불 든 시민의 표정이 밝다.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다 구호를 외쳤다.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메리 탄핵 앤 해피 뉴 대한민국!"

수만 발의 폭죽이 청와대 하늘 위를 수놓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자축하는 승리의 폭죽이었다. 박 대통령 퇴진과 부역자 청산 의지를 담은 경고였다.

지난 10일 밤 청와대 인근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으로 모인 시민들은 구태로 얼룩진 과거를 보내고 국가개조 수준의 새 나라를 만들자는 다짐을 담은 송구영신 세리머니를 했다.

폭죽 대신 촛불을 머리 위로 들고 환호하던 왕청대(75)씨는 "탄핵 가결은 시작일 뿐"이라며 "헌법재판소가 민심을 잘 헤아려 시간 끌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탄핵 결정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탄핵소추안 가결에도 100만 촛불=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에 따르면 이날 7차 촛불집회 '박근혜 정권 끝장내는 날'에는 오후 8시30분 기준 서울 광화문 80만명, 지역 24만명을 합쳐 전국적으로 104만명이 박근혜 대통령 즉각 퇴진을 염원하는 촛불을 들었다. 전날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돼 집회 참석인원이 줄어들지 않겠냐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회사원 정윤영(32)씨는 "전날 야근으로 오늘은 쉴까 생각했었다"며 "헌법재판소가 허튼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한 사람이라도 더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촛불집회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지난 10월29일 2만명으로 시작된 촛불이 여섯 번의 집회를 거듭하며 지난 3일 232만명의 거대 횃불로 번졌다. 국회가 준엄한 민심을 받아안아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지만 이날 집회에서 만난 시민들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입을 모았다.

고등학생 한희(18)양은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졌다는 느낌은 있지만 끝난 건 아니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구속되고, 정경유착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촛불은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손하경(18)양은 "지난주 집회보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다"면서도 "감옥에 가야 할 대통령이 아직도 청와대에서 버티고 있는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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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는 세게, 분위는 화기애애하게=본행사에 앞서 이날 오후 2시30분께부터 광화문캠핑촌과 박근혜 퇴진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는 청와대를 향해 효자로 방면으로 '박근혜 즉각 퇴진 퍼레이드'를 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후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이름을 쓴 가로 60센티미터, 세로 120센티미터 대형 철판을 둘러멘 예술인들이 앞장섰다. '불법왕 정몽구' 글씨를 붙인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캐리커처상 여러 개와 "고마하고 감방가자" 혹은 "박근혜 내려와라" 등의 문구를 담은 만장이 뒤를 따랐다. 청와대 100미터 앞 효자치안센터까지 도달한 행진대열은 전경버스 창문마다 수의를 입고 창살에 갇힌 박 대통령 스티커를 붙이며 환호했다.

유성기업 해고자 도성대(54)씨는 자유발언을 통해 "국민이 차가운 물 속에 수장될 때 장장 90분 동안 머리를 만진 대통령 박근혜를 구속하라"고 호소했다. 문재훈(53)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은 친일파 청산을 못한 것에서 비롯됐다"며 "박근혜 정권 부역자들과 부정부패 더러운 것을 완벽히 청소하자"고 말했다.

행진에 참여한 가수 김장훈씨는 "대통령은 직무정지 전에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해체를 주장한 사람을 민정수석으로 임명했다"며 "국민과 한번 해 보자는 거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며 "장기전 치르는 마음으로 나왔다"고 했다.

오후 4시부터 청와대 앞은 인간띠 잇기 행사에 나선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인산인해를 이뤘다. 시민들은 "하루도 못참겠다. 지금 당장 내려와라" "김기춘·우병우를 구속하라" "내각 총사퇴" "재벌도 공범이다" "우리 힘으로 끝장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구호는 엄중했지만 분위기는 따뜻했다. 한 농민은 광화문 KT 사옥 앞에서 1톤 트럭에 꽉꽉 채워 온 복숭아즙과 여주즙을 바닥에 풀어놓고 시민들이 마음껏 가져가도록 했다. 매주 촛불집회 때마다 가게 앞에서 보리차와 핫팩을 제공해 화제가 됐던 청와대 인근 커피숍 '커피공방'은 이날도 보리차와 핫팩을 무료로 전하며 따뜻함을 나눴다. 차량 통제가 이뤄진 도로 곳곳에서 기차놀이와 춤판이 벌어졌다. '하야가'와 크리스마스 캐럴 펠리스 나비다(Feliz Navidad)를 개사한 "근혜는 아니다~" 노래가 흘러나오면 그곳이 곧 시민들의 무대가 됐다.

광장에서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리는 각종 추모의식이 행해졌다. 광화문역에서 광장으로 나오는 길가에는 304개의 구명조끼가 놓였다. 구명조끼 가슴팍에는 사라진 대통령의 7시간을 의미하는 숫자 7, 바닥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광장에 세운 8미터 높이 대형 촛불 점등식과 함께 세월호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304개의 노란풍선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청와대 앞 폭죽놀이=오후 6시부터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본행사 무대에 오른 유경근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국민의 힘이 있었기에 국회에서 박근혜 탄핵 가결이 가능했다"며 "그 힘을 믿고 세월호 진실을 밝히는 그날까지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날은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수배됐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에서 경찰서로 자진출두한 지 딱 1년 되는 날이었다. 이상진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오늘 청와대 앞 100미터 앞까지 행진허가가 났다"며 "1년 전 청와대로 가는 길목을 넘기 위해 사다리와 밧줄을 준비했다는 이유로 5년형을 받고 수감 중인 한상균 위원장을 생각해 달라"고 호소했다. 시민들은 "한상균을 석방하라"고 외쳤고, 한꺼번에 포털사이트에 '한상균 석방'을 검색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리는 저력을 과시했다.

가수 권진원·이은미씨의 공연도 뜨거웠지만 본행사 하이라이트는 노동가수연합팀과 시민합창단, 시민들이 함께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었다. 군중 속에 앉아 있던 임을 위한 행진곡 원작자 백기완 선생의 얼굴이 화면에 잡히자 시민들은 환호했고, 팔뚝질을 하며 따라 불렀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이후 참가자들은 청와대로 행진하면서 폭죽을 터트렸다.

일부는 헌법재판소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3만여명의 시민들은 헌법재판소 사거리에서 "탄핵을 인용하라" "국민의 명령이다" 구호를 외치고 함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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