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개인적으로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 신분으로 시간을 보낸 지 어느덧 근 사반세기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절 대학은 이른바 ‘운동권 문화’가 캠퍼스 공간을 주도하고 있었다. 교투(교문투쟁)와 가투(가두투쟁) 등 대낮에 시작해 저녁까지 이어지는 ‘투쟁들(protests)’이 일주일이 멀다 하고 벌어졌다.

대학가에 즐비했던 학사주점에서는 늘 ‘운동가요’를 불렀다. 투쟁이 있는 날 학생들은 재차 이곳에 집결해 뒤풀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정리집회를 열었다. 느끼하고 칼칼한 두부튀김찌개를 허기진 뱃속으로 허겁지겁 퍼 넣으며 소주잔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채워 주며 향후 행동결의를 다지는 장이기도 했다. 그 배경음악은 언제나 운동가요였다. 당시 운동가요는 그렇게 대학생들의 저항문화를 상징했다.

지난해 1월 우리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예능방송이 하나 있었다. 간판 예능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이 특집으로 마련한 ‘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였다. 1990년대 가수들의 라이브 무대들을 재현한 이 프로에는 터보·엄정화·쿨·김건모·SES 등 90년대 초중반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다시 등장해 중년 대중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젊은 세대와 청소년에게까지 새롭게 어필했다.

흥겨운 댄스뮤직들이 주를 이뤘고 노래들 하나하나에 어려 있던 잊었던 안무들까지 다시 재현해 그 시절 나이트클럽의 추억에 젖게 해 줬다. 많은 이들이 잠시 그들의 흥겨운 무대를 보고 또 보며, 모든 노래들을 따라 부르고 또 부르며, 마음껏 이 나라의 90년대 버전의 대중문화를 함께 소비했다.

90년대 청년문화는 이렇게 저항문화와 대중문화로 양분돼 있었다. 한편으로 대학가 캠퍼스에서 그리고 주변 학사주점에서 운동권 주도 저항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면, 다른 한편으로 도심의 네온사인 골목들과 TV 브라운관 안에서는 상업적인 대중문화가 대중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리고 양자 간의 교통은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세련된 형식과 첨단 전자사운드로 무장하고 시장기제의 혁신지향적 경쟁 속에서 산업화돼 가고 있던 대중가요에 비해 마치 군가나 만화영화 주제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단조롭고 단순한 선율을 수공업적 방식으로 생산해 가던 운동가요는 소비자들에게 어필하지 못했다. 노찾사의 노래를 비롯한 서정적인 곡들 일부가 몇몇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종종 등장하기도 했지만, 세련된 장르의 조합과 참신한 안무를 겸비한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애절한 발라더인 신승훈 같은 이들이 주도하는 대중음악의 장 속에서 양념 수준으로 통용되는 정도였다.

결국 사회 민주화가 심화하면서 그 기능성에 의심도 갔던 데다, 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경제의 찬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대학가에서 운동의 물결이 약해졌고, 저항문화의 지배성으로부터도 벗어나게 됐다. 청년문화 내에서 저항문화와 대중문화의 ‘문화경쟁’은 자연스럽게 후자의 승리로 돌아갔다. 경기의 호·불황과 무관하게 대중문화는 더욱더 세련되게 혁신을 이뤘고, 운동가요는 거의 불리지 않는 수준이 됐다.

최근 초등학생인 아이와 함께 서울에서 열린 촛불집회를 찾았다. 10대 학생들의 발랄한 구호와 다양한 풍자가 거리를 장식했다. 참석 후 아이에게 물었다. “어땠니?” “응 재미있었어.”

과거 필자의 대학 시절 시위들은 의미 있고, 진지하기는 했지만 재미를 찾기는 힘들었다. 늘 지랄탄이 난무하고 백골단의 이단옆차기, 전투조의 쇠파이프질과 화염병 투척, 그리고 투석전 등 매우 위험하고 폭력적인 수단들이 투쟁 현장의 소품들이었다. 거리 대오 속에서는 전운이 감돌았고 그 결연했던 공간의 청각적인 여백은 단순한 리듬의 운동가요와 결연한 구호가 자리했다.

2016년 겨울 우리들은 많은 것들의 변화를 이뤄 가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시위문화다. 지금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선 이들은 마음은 결연해도 표현은 유연하다. 축제를 방불케 하는 몸짓과 자유로운 발걸음들. 비폭력은 기본이다. 축제와 같은 투쟁이 끝난 후 거리는 청소작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여기에 의미심장한 모습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운동가요와 대중가요가 그 자리에서 전혀 어색하지 않게 하나로 어우러져 공존하는 것이다. 100만 촛불 속에는 이제 이승환·전인권·한영애 등 대중가수들이 함께하며 빛을 더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불린다. 새로운 저항상품인 하야송도 출시돼 애창된다. 대중가요를 패러디한 저항노래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간 문화적인 편식을 싫어하는 이들은 저항문화와 대중문화의 좋은 것들을 다 같이 추구해 왔다. 그들에게 지금 ‘저항문화의 밥’이 ‘대중문화의 김’에 싸여져 새로운 시대의 ‘문화김밥’이 만들어지고 있는 모습은 사뭇 신기하다. 새로운 저항공간에 이렇게 문화적 퓨전이 실험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하야민심이 광범위하고 보편적이라는 것과 대중 의식이 자발성과 창의력의 옷을 입고 새로운 미래를 강하게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러한 역동성을 신나게 관찰하고 있자니, 지금 진행되는 문화적 실험의 만개를 위해서는 촛불집회가 더 이어져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번 사태의 조속한 정리와 새로운 질서를 향한 건설적 국면으로의 돌입은 응당 이뤄져야겠지만 말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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