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민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얼마 전 영국안전보건청이 자기 나라의 2015~2016년 안전보건 통계를 발표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답한 설문조사 결과에 근거해 130만명의 노동자가 업무상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봤다. 놀랍게도 이 중 50만명은 업무상 스트레스·우울증 등 정신적 질환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업무상 근골격계 질환만큼 큰 문제가 업무상 정신질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과 관심이 낮아서 그렇지, 업무상 정신질환과 직무스트레스는 이렇게 흔하고 중요한 문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세계보건기구가 자살률을 집계하는 171개 나라 중 2위(2012년 통계)인 우리나라에서 업무상 정신질환이나 직무스트레스 문제는 국가가 사활을 걸고 풀어 나가야 하는 우선과제다. 그런데 지난 몇 년 사이 6명의 노동자가 정신질환으로 산재 승인을 받은 유성기업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대응을 보면 이런 문제의식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회사로부터 징계와 고소를 되풀이 당하던 한 노동자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뒤 이 사태에 대해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39명이 의견을 발표했다. 유성기업에서 정신건강에 관한 임시건강진단을 실시하고 더 이상의 비극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2016년 4월7일의 일이다.

임시건강진단은 같은 부서에서 일하거나 비슷한 유해요인에 노출된 노동자들에게서 비슷한 질병이 집단적으로 나타나거나, 나타날 것으로 우려될 때 실시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질병에 걸렸는지, 또 그 원인은 무엇인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 건강검진을 하는 것이다.

유성기업에서는 6명이나 되는 노동자가 업무상 이유로 정신질환에 걸렸고, 그중 한 명은 사망했다. 이건 집단적인 직업병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우려에 대해 노동부도 공감했기 때문에 7월29일 유성기업에 임시건강진단 명령을 내렸다. 정신건강문제에 대해 임시건강진단을 내린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다. 그러나 전문의들이 의견을 발표한 지 8개월이 지나고, 노동부가 임시건강진단 명령을 내린 지 넉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성기업에서 임시건강진단이 시작됐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임시건강진단은 사실 대단한 일이 아니다. 임시건강진단으로 즉각 중재가 필요한 노동자를 찾아낸다면, 치료와 상담을 해야 한다. 다수 노동자의 정신건강이 악화된 구조적 원인을 찾아낸다면, 그 원인을 제거하거나 완화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임시건강진단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임시건강진단은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에서, 그 동료들에게 “당신들은 괜찮습니까?”라고 물어보는 일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이 급하고도 간단한 일이 첫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다.

임시건강진단이 시급한 것은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우울감을 속으로 삭이고, 분노를 자기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풀면서, 혹은 매일매일 죽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러 가며 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조건·어떤 경험이 노동자들을 힘들게 만드는지, 노동자들 스스로는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가 드러나야 한다. 이를 통해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대책을 마련할 때 참고해야 한다. 이미 한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더 이상 늦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지금 우리는 노동자 괴롭히기와 이간질, 동료에 의한 폭력 등이 노무관리의 한 방편으로 뻔뻔하게 사용되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목도하고 있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정신건강 문제가 1개 사업장 노사 간에 풀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노동부는 더 이상 실행의지가 없는 사측에만 이 문제를 맡겨 두지 말고, 임시건강진단 명령이 실행될 수 있도록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 회사의 노무관리에 의해 개별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이 파괴되고 있는 이 상황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유성기업도 전향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회사는 근로복지공단이 정신질환에 따른 노동자들의 산재를 인정하자 해당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진행 중이다. 해당 소송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자기 사업장 노동자들이 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겸허하게 돌아보는 것이 정상적인 기업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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