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이상하다. 박근혜 퇴진 국면이 이어지면서 정권 부역자 검찰이 수사 주체로, 박근혜의 새누리당이 탄핵 주체로, 뇌물비리의 물주 재벌이 피해자로, 정권 찬양과 북한 탓만 해 온 보수언론이 민주주의 수호자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부지불식간에 일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따져 보자. 우리가 박근혜 게이트에서 가장 분노하는 건 부익부 빈익빈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부정경쟁으로 눈총을 받던 최순실씨의 딸은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며 오히려 동료들을 비난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노동자의 자식은 부모 탓에 꿈을 포기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사이에서도 빈부격차가 가장 큰 나라다. 실질임금은 십수 년째 거의 오르지 않았지만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익부 빈인빈 체제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없다면, 박근혜가 사라져도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는 노동자는 못난 부모로 계속 남는다.

박근혜 게이트에서 우리는 공권력의 파렴치함에 치를 떨었다. 1년 전 앞장서 "박근혜 퇴진"을 외쳤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감옥에 갔고, 온갖 욕을 얻어먹다 박근혜 수사에 나선 검찰은 '정의의 사도' 행세 중이다. 더군다나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한 위원장에게 징역 8년을 구형했다. 검찰 논리에 따르면 박근혜 퇴진 요구에도 불법과 합법이 있고, 흙수저와 금수저가 있는 셈이다. 검찰이 부역자로 처벌받는 것이 아니라 수사 주체로 남는다면, 박근혜가 퇴진해도 검찰은 가진 자에게는 솜방망이, 노동자에게는 불방망이로 남을 것이다.

우리가 수십 년간 문제를 제기했던 재벌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박근혜 게이트의 몸통이었다. 삼성은 최순실에게 뒷돈을 대주고 경영권 승계를 위해 국민연금을 멋대로 부렸다. 현대차는 노사관계를, 롯데는 경영권 분쟁을, CJ는 회장의 특별사면을 청탁했다. 그런데 최근 이 재벌들이 비선실세에게 삥을 뜯긴 피해자로 둔갑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재벌의 노조파괴 공작에 맞서 노동기본권을 요구하면 노조 탓에 국민경제가 피해를 입었다고 하고, 재벌에게 떼어 주려는 공공부문 민영화를 반대하면 노조 탓에 국가경제가 위협받는다고 한다. 재벌이 피해자로 남는다면, 박근혜가 퇴진하더라도 이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노동자를 짓밟으며 부를 쌓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박근혜 정권은 '북한 탓 정권'이다. 박근혜는 임기 내내 보수세력의 반북 정서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정권의 모든 실정을 덮고 지지세력을 모았다. 박근혜가 임기 초 보수세력을 결집시키며 집권 기반을 다진 계기가 통합진보당 해산이었다. 종북좌파를 때려잡겠다며 1년 넘게 마녀사냥을 했다. 집권 2년차에는 “통일대박”으로 표현된 대북정책으로, 집권 4년차에는 개성공단 전면중단과 북한붕괴론으로 남북 간 군사 긴장을 높였다. 이때마다 보수언론은 정권을 지지하며 반공·반북으로 모든 문제를 덮었다. 보수언론이 지금처럼 정권 퇴진의 나팔수로 역할한다면, 박근혜가 퇴진해도 북한 탓으로 실정을 덮는 지배자들의 작태는 계속될 것이다.

최근 우리의 깊은 좌절은 힘 있는 자들이 민중에게 요구하는 굴종에서 비롯됐다. “민중은 개돼지” 혹은 “국민은 시간이 지나면 잊는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배세력은 애당초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막말을 내뱉는다.

이런 말들이 사실 우리에겐 그다지 낯설지 않다. 관리자들이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가 일상적으로 그렇다. 노조가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90%의 노동자에게는 노조가 없다. 정치 민주화가 이뤄졌다 해도 우리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작업장은 여전히 주권자가 아니라 굴종하는 ‘근로자’의 세계다. 우리가 일터에서 주권자가 되지 않는 한 박근혜가 퇴진해도 굴종하는 삶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이래서는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일 뿐이다. 지금 지배세력은 박근혜 퇴진을 역으로 이용해 이런 체제를 다시 반복하려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재벌 총수를 반드시 구속시켜야 한다. 정치 검찰은 해체시켜야 한다. 빈부격차를 확대한 정부 정책은 모조리 폐기해야 한다. 사드 배치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없었던 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지배계급이 국민을 두려워하도록 국민이 광장에서 박근혜와 공범을 처벌하고, 작업장에서 사업주가 노동자를 무서워하도록 노조할 권리를 2천만 노동자 모두에게 보장해야 한다. 박근혜와 함께 박근혜를 만든 체제도 해체시켜야 한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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