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행정부 말기였던 2000년 10월 말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다. 김정일을 만난 자리에서 경제개방을 고려할 것인지 물었고, 김정일은 “우린 서구와 같은 개방은 수락하지 않습니다. 개방이 우리의 전통을 훼손해선 안 됩니다”라고 답하며 자유시장과 사회주의를 혼합하는 중국식 모델에는 관심이 없다고 덧붙였다. 김정일은 스웨덴 모델이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적이라면서 스웨덴식 모델에 마음이 끌린다고 말했다.

다른 모델은 없냐는 매들린의 물음에 김정일은 “태국은 강한 전통적 왕실을 유지하면서도, 긴 격동의 역사에서 독립을 보존해 왔고, 그러면서도 시장경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태국식 모델에도 관심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매들린은 김정일이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태국의 경제 체제일까, 아니면 왕실의 보존일까 하고 생각했다고 그의 자서전 <마담 세크리터리>에 썼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정일이 태국의 경제 체제와 왕실의 보존 둘 다에 매력을 느꼈다고 본다.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왕이 죽자 북한은 김정은 명의의 조전을 발송했다. 북한은 조전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이신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는 (10월) 15일 타이왕국 왕세자 마하 바지라롱콘(와치랄롱꼰)에게 조전을 보내시였다. (…) 슬픈 소식에 접하여 전하와 그리고 전하를 통하여 유가족들과 타이왕국 정부와 인민에게 심심한 애도와 깊은 위문을 표하고, 푸미폰 아둔야뎃 폐하는 조선과 타이 두 나라 사이의 친선협조관계를 귀중히 여기고 관계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며 "비록 서거하였으나 폐하의 고귀한 업적은 우리 두 나라 인민들과 진보적 인류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지난 10월13일 죽은 푸미폰 왕은 1927년 12월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났다. 미국은 속지주의를 채택한 나라이므로, 푸미폰 왕은 태어나자마자 미국 국민이 됐다. 아기의 아버지는 국왕 라마 7세가 아니라 그의 동생 마히돈 왕자였다. 당시 마히돈은 하버드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막내로 태어난 푸미폰은 위로 누나와 형을 뒀다. 원래 “아기 송크람”으로 불리다가 라마 7세가 ‘푸미폰 아둔야뎃’란 이름을 내려 줬다. 그 뜻은 “땅의 힘, 비길 데 없는 권능”이다. 아버지 마히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미국에서 죽었다.

1932년 일어난 무혈 혁명으로 차크리 왕조의 라마 7세는 절대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의 전환을 받아들여야 했다. 절대군주국은 주권이 군주에게 있는 체제고, 입헌군주국은 군주가 존재하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체제를 말한다. 군주의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the rule of law)’를 명시한 헌법이 만들어졌다. 의회와 수상에 권력을 넘겨준 라마 7세는 “이 땅의 최고 권력은 모든 인민에게 속한다”고 선언해야 했다.

근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법률이 만들어지면서 왕실과 정부의 갈등은 고조됐다. 내란이 일어나고 구권력과 신권력이 충돌하는 와중에 라마 7세는 1935년 퇴위하고, 얼마 후 망명길에 오른다. 그리고 푸미폰의 형 아난타 마히돈(1925년생)이 라마 8세로 새로 왕위에 오르게 됐다. 당시 푸미폰의 가족은 스위스에 있었기 때문에 라마 8세는 1938년에서야 태국으로 들어온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난 새 왕으로서는 첫 태국 방문이었고, 그의 왕위 기간 동안 군부 출신의 피분 장군이 수상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1946년 6월9일 아침, 라마 8세는 방콕 왕궁의 침실에서 머리에 총을 맞은 시체로 발견됐다. 왕위는 푸미폰에게 돌아갔고,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소년은 그날 오후 라마 9세로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 2016년 10월13일 사망할 때까지 70년을 태국의 국왕으로 군림하면서 유명무실하던 군주제를 군부와 미국 그리고 불교의 지원을 등에 업고 “최고 중재자이자 국민의 최고 화해자의 지위”로 격상시키면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제로 탈바꿈시켰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태국은 봉건주의가 청산되지 못한 채, 전근대적인 주술적 종교 국가, 즉 ‘불교 왕국’으로서의 유산을 사회 곳곳에 유지하게 됐다. 아마도 이런 태국의 역사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른바 ‘백두 혈통’의 정통성을 사상적·이론적으로 정립해야 했던 북한 당국에 큰 영감을 줬을 것이다. 이 때문에 김정일은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만나 북한의 미래를 담판 짓는 자리에서 태국을 북한의 모델로 언급했던 것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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