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우조선해양 서문 앞에서 야간 문화제를 개최한 참가자들은 퇴근길 하청노동자들에게 노조 가입을 홍보했다. 고용안정호 출항식을 알리는 대동굿을 개최하는 것으로 이날 행사는 마무리 됐다. 제정남 기자
▲ 대행진 참가자들은 거제시내를 행진하며 조선소 하청노동자 고용위기 문제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제정남 기자
▲ 조선 하청노동자 대량해고저지 시민사회대책위원회는 지난 29일 오후 오후 거제 아주공설운동장에서 '1029 조선소하청노동자 대행진'을 개최했다. 전국 7개 지역에서 희망버스를 타고 모인 시민 600여명이 함께 했다. 제정남 기자

"예전에 대우조선해양에서 근무했어요. 지금도 함께 일했던 동료와 선후배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정리해고되거나 쫓겨나다시피 하는 경우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남 일 같지 않아서 희망버스에 탔습니다."(한국지엠 사무직 노동자)

"군 제대 후 조선소 물량팀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경험이 제 인생의 변곡점이 된 것 같네요. 얼마 전 거제 조선소 이야기를 사진·영상으로 담은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조선업 구조조정 사태를 먼 거리에서 바라만 보기가 너무 힘들어서 희망버스에 동참했습니다."(김경호 작가)

지난 29일 경상남도 거제로 향하는 희망버스에 올라탄 참가자들이 인사를 건네며 밝힌 사연들이다. 쌍용자동차·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투쟁 현장과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농성장, 제주도 해군기지 반대투쟁 현장,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투쟁 현장을 찾았던 희망버스가 이번에는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거제로 향했다. 서울·부산·대구·울산·광주·목포·아산에서 시민 600여명이 희망버스에 몸을 실었다.

“하청노동자 응원합니다” … 전국 7곳에서 희망버스 '부릉'

조선업 생산직은 원청업체 정규직과 1차 사내하청업체 상용직·기간제, 하청업체와 계약을 맺은 물량팀으로 구성된다. 물량팀은 다시 상시 물량팀과 돌관팀(돌격해 관철한다는 의미로 사용)으로 나뉜다. 1차 하청업체에서 선박파트 제작을 도급받은 2차 사외하청업체에도 상용직·물량팀이 존재한다.

원청 조선소의 업무량(선박수주) 변동에 따라 원청 정규직을 제외한 비정규 노동자들의 고용은 상시적으로 변한다. 원청 사용자는 하청노동자라는 고용 완충지대를 만들어 손쉽게 조선소를 운영한다. 하청노동자가 쉽게 해고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해 연말에 시작된 조선업 구조조정 한파가 하청노동자에게 더욱 매섭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6월까지 하청노동자 1만8천여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는 내년까지 5만6천명에서 6만3천명이 해고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위기에 놓인 것은 비정규직만이 아니다. 현대중공업은 분사 방식에 따라 이미 1천여명을 자회사로 전직시켰다. 추가로 4천300여명을 외주화할 방침이다. 삼성중공업은 전체 정원의 30~40% 감축을 추진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은 1천여명을 내쫓기 위해 희망퇴직을 실시 중이다. 정규직노조들은 조선업종노조연대로 뭉쳐 정부를 상대로 구조조정 중단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데 구조조정 국면에서 하청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좀체 들리지 않는다. 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와 노조 서남지역지회가 각각 울산지역과 전남지역 하청노동자 조직화 사업을 하고 있지만 조합원은 수백여명에 그친다. 최근 금속노조는 조선소가 밀집한 거제·통영·고성 지역에 기반을 둔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하청노동자를 노조로 끌어들이겠다는 계획이다.

거제에서 하청노동자대행진 열려 … “응원 힘입어 조직화 사업 박차”

희망버스는 지회 설립을 준비 중인 하청노동자들을 응원하고, 노조가입을 독려하는 목적에서 준비됐다. 조선 하청노동자 대량해고 저지 시민사회대책위원회는 이날 오후 거제 아주공설운동장에서 '1029 조선소하청노동자 대행진'을 개최했다.

비선실세 최순실 사태를 규탄하는 집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와중에도 기꺼이 거제로 발길을 옮긴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국정농단에 흔들리지 않는 노동자 권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싸우는 노동자를 지지하는 민중운동이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희망버스 참가자 사이로 STX조선해양·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사내하청 노동자 수십명이 자리를 잡았다.

대행진 본행사 무대 위에 오른 삼성중공업 하청노동자는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용기가 많지만 어떤 이는 용기를 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한다"며 "이젠 하청노동자 임금·퇴직금·고용안정 문제를 원청이 책임지라고 외치고 싶다"고 말했다.

시민대책위는 이날 행사를 위해 시민 4천500여명이 십시일반으로 모금한 돈으로 '고용안정호'를 제작했다. 미술·예술노동자 6명이 1주일간 작업한 끝에 완성했다.

희망버스 참가자 대표단은 고용안정호 위에 올라 하청노동자 조직화 사업에 힘을 보태겠다는 응원을 보냈다. 이상진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국정농단 세력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재벌들은 돈잔치를 하는 사이에 우리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잘려 나갔다"며 "조선업 위기를 초래한 공범인 경영진과 정부를 심판하고, 하청노동자 중간착취를 끝내는 투쟁을 전개하자"고 말했다.

하청노동자 당사자들은 이날 행사를 계기로 조직화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하창민 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은 "조선소 정규직도 구조조정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파업투쟁을 했지만 조선소 생산직의 80~90%가 하청노동자인 탓에 그 효과가 크지 않다"며 "정규직과 하청노동자가 뭉치지 않고서는 구조조정 저지투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호소했다.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조선업 기능인력 17만1천593명 중 79.1%인 13만5천785명이 물량팀을 포함한 하청노동자였다.

조기형 노조 서남지역지회장은 "원청이 하청노동자의 고용·임금을 책임지도록 힘을 모으자"고 말했다. 김동성 거제통영고성사내하청지회준비위원회 위원장은 "하청노동자들이 주인공이 되는 오늘 행사를 손꼽아 기다려 왔다"며 "희망버스 응원을 받아 지회가 강력한 노조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쏟겠다"고 약속했다.

대우조선해양 퇴근길 하청노동자 대상 ‘노조가입’ 선전전

대행진 본행사를 마친 뒤 참가자들은 고용안정호를 앞세우고 아주공설운동장에서 대우조선해양 서문까지 2킬로미터 가량 거리를 행진했다. 대규모 인원의 거리행진이 낯선 풍경인 듯 거제시민들은 행진 모습을 연신 카메라에 담았다.

대우조선해양의 토요일 근무는 오후 5시까지다. 서문까지 행진한 참가자들은 퇴근길 하청노동자들을 상대로 지회 설립준비 사실을 알리고 조합원 가입 유인물을 전했다. 작업복 왼쪽 가슴에는 '대우조선해양' 마크를, 오른쪽 가슴에는 하청업체명을 붙인 적지 않은 하청노동자들이 문화제에 관심을 보이며 발길을 멈췄다.

노란색 안전모를 손에 들고 퇴근하던 전아무개씨는 "미래 계획은커녕 그냥 조금이라도 오래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근무한다"며 "일감 떨어진 뒤 대책이 안보여 앞이 캄캄하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하청노동자는 "정규직 이야기는 조선소 안에서 많이 돌지만 하청 문제에 대한 소식을 말해 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하청노동자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신기하다"고 관심을 보였다.

정규직노조들은 "하청노동자 조직화 사업에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백순환 대우조선노조 비정규대외협력실장은 문화제 무대에 올라 "그동안 하청노동자 조직화도 못하고 노조도 만들지 못해 부끄럽고,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고맙기도 하다"며 "하청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최선을 다해 부끄럽지 않은 노조활동가가 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노조는 두 차례 노조위원장을 맡은 백 실장에게 하청노동자 연대사업을 맡겼다. 문화제 사회는 박성호 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이 맡았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스님들의 '연대의 북울림' 행사로 시작한 문화제는 고용안정호 출항식을 개최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참가자들은 각자 소원을 담은 종이배를 고용안정호에 넣은 뒤 어울림 대동굿에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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