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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된 혁명, 스페인을 가다-상] 혁명과 내전의 땅 스페인 '노동자·민중 항전' 제 몸에 새겼다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스페인 혁명 유적지 답사기 … 바르셀로나에서 게르니카까지
연윤정  |  yjyon@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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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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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주익 언덕에서 내려다본 바르셀로나 시내와 항구. 연윤정 기자

스페인은 여러모로 우리나라와 닮았다. 3년간의 내전과 36년간의 군사독재를 겪었다. 외세 개입을 경험했고 20세기 이념의 격전장이 됐다. 스페인은 혁명을 꿈꿨다. 노동자·민중의 힘으로 인민전선 정부가 들어섰으나 파시즘으로 무장한 프랑코와 자본가·지주·가톨릭교회가 합세해 이를 뒤집었다. 좌절된 혁명의 나라, 스페인이 궁금했다.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이사장 김정근)는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7일까지 6박8일 일정으로 스페인 혁명(스페인 내전)을 살피는 대장정에 나섰다. 2013년 6월 출범한 연구회는 이듬해인 2014년 9월 7박8일간 러시아 혁명 유적지 답사를 다녀왔다.

스페인 혁명 답사단은 21명으로 구성됐다. 당초 연구회 상임고문인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이 단장을 맡았으나 갑작스런 개인 사정으로 합류하지 못했다. 대신 단장을 맡은 김정근 이사장을 비롯해 민주노총·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민주연합노조·서울동부비정규노동센터·노동광장 활동가와 가족이 참여했다.

   
▲ 바르셀로나 시내 중심에 위치한 카탈루냐 광장. 남쪽으로 람블라스 거리와 이어져 있다. 연윤정 기자
   
▲ 카탈루냐 광장에서 람블라스 거리를 거쳐 항구까지 연결된다. 스페인 내전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가 됐다. 연윤정 기자

스페인에서 혁명이 있었다고?

스페인은 흔히 태양과 정열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관광대국이다. 한때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아시아에 식민지를 뒀던 제국이기도 하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스페인의 영광은 산업사회와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근대로의 진입이 늦어지면서 쇠락해 버렸다. 1800년대 왕정과 지주·가톨릭으로 대변되는 봉건세력과 공화주의·자치주의·노동운동 같은 근대세력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은 1900년대 들어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파시즘 등장이 맞물리면서 ‘내전’으로 폭발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 혁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페인은 1923년 프리모 데 리베라의 쿠데타로 인한 군사독재를 거쳐 1931년 제2공화국을 수립했다. 사회주의자 아사냐 총리는 토지개혁과 주 8시간 노동제를 포함한 일련의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1933년 총선에서 승리한 우파정권은 이를 무위로 되돌렸다. 이에 반발해 1934년 10월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에서 노동자 수만명이 봉기를 일으킨다. 우파정권은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했다. 노동자 1천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천명이 구속됐다.

결국 1935년 말 우파정권이 퇴진하고 이듬해 2월 총선에서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공산당·공화좌파·노동총동맹(UGT)·통합노동자당(POUM) 등으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승리했다. 노동자·민중의 힘이 만들어 낸 혁명이었다. 인민전선 정권은 우파정권이 무위로 돌린 개혁정책을 되살리고 직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를 복직시켰다.

그러자 왕당파·지주·자본가·가톨릭교회의 불만이 고조됐다. 1936년 7월 스페인령 모로코에 머물고 있던 프랑코와 스페인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스페인 내전은 이들 자본가와 파시즘 세력에 맞서 노동자·민중이 일궈 낸 공화국을 지키려는 혁명의 과정이었다.

   
▲ 람블라스 거리 끝에 위치한 항구에 위치해 있다. 콜럼버스가 지중해를 향해 손을뻗치고 있다. 김성열 한국지엠지부 조합원


공화국 최후의 거점 바르셀로나

스페인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각 9월30일 밤 11시16분.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바르셀로나에 도착하기까지 15시간이 걸렸다. 스페인은 한국보다 7시간(서머타임 적용) 느렸다.

"Sortide,

Exit,

Salida."

바르셀로나 공항에는 출구 표지판이 세 가지 언어로 적혀 있다.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어를 따로 쓴답니다. 그래서 표지판에 카탈루냐어와 스페인어를 모두 표시한 거죠.”

답사단과 함께한 최명숙 두레여행사 이사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카탈루냐어일까. 정답은 가장 위쪽에 적힌 'Sortide'다. 카탈루냐인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내전과 관련해 매우 유서 깊은 곳이다. 공화국 진영이 반란군(프랑코군)에 맞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곳이기 때문이다. 공화국 진영의 최후 거점이었던 셈이다.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주의 주도다. 스페인 동부 지중해를 접한 항구도시이자 스페인 최대 산업도시다. 19세기 말부터 스페인 사회주의와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의 중심 무대가 됐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국제여단 의용군이 프랑스에 접한 카탈루냐를 통해 입국했다. 영국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을 보면 주인공 데이비드 카가 공화군에 가담하기 위해 영국에서 프랑스를 거쳐 철도를 타고 바르셀로나로 들어온다. 이때 스페인 철도노조 소속 승무원이 빈털터리가 돼 티켓을 못 내미는 그를 뜨겁게 맞아 주던 장면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스페인 카탈루냐와 바스크는 분리주의가 강한 곳이다. 두 지역은 모두 고유 언어가 있다. 지금의 스페인어는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카스티야 언어다. 카탈루냐와 바스크가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한 공화국 정부와 함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우디와 지중해를 품은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는 가우디가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답사단의 안내를 맡은 김진웅 가이드의 설명이다. 그는 스페인에서 16년째 살고 있다. 기타를 전공했다.

10월1일 첫 방문지로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성당을 방문했다. 세기의 천재 건축가 가우디(1852~1926)가 1882년 착공해 현재까지 짓고 있는 성당이다. 흔히 옥수수 모양의 탑 네 개로 알려져 있다. 네오고딕 양식을 취하면서도 가우디만의 자연주의와 무데하르(이슬람과 기독교 양식의 조화)가 어우러져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가우디 사후에는 다른 건축가들이 건축을 맡으면서 다른 양식을 보이고 있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 건축이 중단됐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재개됐다고 한다.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한다.

이어 답사단이 찾은 곳은 구엘공원과 카사 바트요·카사 밀라·구엘저택이다. 모두 가우디가 건축한 건물이다. 창의적인 상상력이 돋보였다. 가우디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면 어디를 가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이것이 바르셀로나를 모더니즘 건축의 중심지로 만든 힘이 아닐까.

바르셀로나는 연중 햇살이 가득하고 부드러운 지중해 바람이 닿는 곳이다. 세계의 선박이 드나드는 항구를 끼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조화롭게 서로를 보듬고 있다.

답사단이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몬주익 언덕이었다. 몬주익 언덕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주경기장이 있던 곳이다. 황영조 선수가 이 언덕을 첫 번째로 올라 우리나라에 마라톤 금메달을 안겼다. 경기도(당시 임창열 도지사)는 2001년 바르셀로나와 자매결연을 맺고 황영조 선수 부조상을 세웠다.

“한국과 스페인은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점점 양국 간 자매결연을 맺는 도시들이 늘고 있긴 해요. 머드 축제로 유명한 충남 보령시와 토마토 축제로 유명한 부뇰, 서울 강동구와 세고비아가 자매결연을 맺었습니다.”

   
▲ 카탈루냐 성지인 몬세라트 수도원. 연윤정 기자
   
▲ 사라고사의 대성당 벽면에는 이슬람과 기독교 두 양식이 조합된 아름다운 무데하르 양식을 뽐내고 있다. 연윤정 기자

몬주익 언덕에서 바라본 바르셀로나 항전


몬주익 언덕은 스페인 내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몬주익 언덕에 올라서면 아름다운 바르셀로나 항구와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스페인 내전 초기 공화국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할 기회가 있었지만 때를 놓치고 만다. 노동자들이 무기지급을 요구했는데, 공화국 정부가 미적거린 것이다.

바르셀로나는 달랐다. 당시 반란군은 바르셀로나를 가장 중요한 점령 대상으로 지목했다. 카탈루냐 통합사회당(카탈루냐 공산당·PSUC)은 콜론호텔, 통합노동자당은 팔콘호텔, 전국노동연합(CNT)-노동총동맹은 리츠호텔을 장악해 지휘본부를 구성했다. 람블라스 거리를 비롯한 거리 곳곳의 포석을 뜯어내어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전국노동연합이 전신전화국(텔레포니카)을 장악하면서 반란군 간 연락을 막았다. 경찰인 치안대와 돌격대도 동참했다. 몬주익 성채에서는 수비대 병사들이 반란군에 동조한 장교들을 죽이고 무기고 열쇠를 전국노동연합에 넘겼다.

몬주익 지구에는 또 다른 스페인 내전 흔적이 남아 있다. 몬주익 성(Castillo de Montjuic)은 프랑코군이 승리한 뒤 공화국 진영에 속한 정치인·노동자·시민을 처형하거나 수용하는 감옥으로 쓰였다. 지금은 무기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답사단은 몬주익 언덕에서 내려와 바르셀로나 시내로 들어섰다. 람블라스 거리의 시작인 카탈루냐 광장은 스페인 내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전국노동연합이 장악했던 전신전화국이 카탈루냐 광장 근처에 존재했다.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공화국 진영에서 벌어진 ‘내전 속 내전’의 출발점인 곳이다. 현재는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답사단이 찾을 수는 없었다.

금속노조 현대제철지회 조합원 최승회씨는 “인터넷 검색을 하다 옛날 전신전화국 사진을 찾았는데 그만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렸다”며 “그 사진과 대조해 보면 위치를 짐작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의 결사항전 현장, 람블라스 거리

람블라스 거리는 상상했던 것보다 넓지 않았다. 국제여단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에 따르면 그의 아내가 이 거리 초입의 콘티넨탈호텔에 머물렀다. 스페인 여행책자에는 나오는데 실제로는 찾지 못했다.

람블라스 거리는 카탈루냐 광장에서 항구까지 1킬로미터 일직선으로 연결된 도로다. 과거에는 항구에서 들어온 물자가 이 거리를 통해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국을 도운 소련이나 멕시코에서 보낸 전쟁물자가 항구를 통해 들어와 이 거리를 거쳤으리라. 현재는 레스토랑과 카페·꽃가게·재래시장(보케리아 시장) 등이 위치해 있다.

김진웅 가이드는 “스페인 내전 때 반란군의 폭격을 받아 바르셀로나 거리가 많이 상했다”며 “내전이 끝난 뒤 리모델링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람블라스 거리를 걷다 도착한 항구에는 60미터 높이의 콜럼버스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1888년 바르셀로나 박람회를 열면서 미국과의 교역을 기념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스페인 내전 당시 콜럼버스 기념탑 근처를 장악하고 있던 반란군을 노동자와 돌격대가 급습해 궤멸시키기도 했다.

최근에는 일부 바르셀로나 시의원들이 콜럼버스 기념탑 철거를 주장한다. 식민시대가 낳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라는 부정적인 잔재를 기념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논란이야 어떻든 콜럼버스는 지중해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 남부 항구도시 카디스에서 출항해 대서양을 넘어 스페인에 신세계를 열어 줬다.

바르셀로나는 1939년 1월 반란군에 의해 점령됐다. 공화국 진영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바르셀로나 항구를 통해 탈출했다.

   
▲ 게르니카 의회에서 바라본 마을 모습. 스페인 내전 당시 폭격을 당했다. 현재는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마을 모습을 하고 있다. 연윤정 기자
   
▲ 게르니카 거리의 한 병원 벽면에 타일로 꾸민 피카소의 <게르니카> 벽화. 실제 피 카소의 <게르니카>는 마드리드에 있는 국립소피아왕비예술센터에 있다. 연윤정 기자


조지 오웰과 파블로 네루다를 기억하다

답사단 중 일부는 이날 저녁 람블라스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고딕 지구의 조지 오웰 광장을 찾았다. 스페인 사람들은 시에스타(낮잠) 때문에 저녁식사를 밤 9~10시에 한다. 그래서일까. 밤 10시가 됐는데도 바르셀로나 골목 식당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걷다가 마주한 공터 크기의 조지 오웰 광장. 2003년 조지 오웰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근처에는 통합노동자당이 쓰던 건물도 있다.

광장에는 초현실주의 조각가 크리스토폴(Leandre Cristofol)의 조형물도 있다. 8미터 높이의 조각인데, 위쪽에 지구 모양을 형상화하고, 받침대인 원통 모양의 흰 돌을 넝쿨 같은 스테인리스가 휘감으며 지구를 떠받친다. 조지 오웰의 지적 고뇌와 진실을 향한 집요한 탐사 욕구를 형상화했다는 설명이다.

광장을 지나 시청사와 대성당, 왕의 광장을 거쳐 콜론호텔에 다다랐다. 콜론호텔은 카탈루냐 공산당의 지휘본부가 있던 곳이다. 건물 곳곳에는 치열한 시가전을 떠올리게 하는 총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쉽게도 통합노동자당과 전국노동연합(CNT)-노동총동맹이 각각 지휘본부로 쓰던 팔콘호텔과 리츠호텔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남쪽에는 파블로 네루다 광장이 있다. 답사단은 그곳을 가지는 못했지만 스페인 내전을 지켜봤던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잠시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네루다는 1934~1939년 외교관으로 스페인 내전을 목도하면서 인간적 연대를 역설하고 반파시즘 시를 썼다. 1970년 그의 모국인 칠레에서도 인민연합 정권인 아옌데 정권이 들어섰다. 1973년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자 네루다는 병상에서 항의하는 시를 쓰다 눈을 감았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권과 닮은 칠레의 인민연합 정권의 스러짐이 무상하다.

나폴레옹과 프랑코에 맞선 카탈루냐의 성지

10월2일 답사단은 카탈루냐의 성지 몬세라트를 찾았다. 바르셀로나에서 서쪽으로 53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은 해발 1천235미터 높이의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톱으로 자른 것 같다 해서 ‘톱니 산’이라는 뜻의 몬세라트로 불린다. 해발 725미터 산 중턱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자리 잡은 몬세라트 수도원과 검은 성모상이 유명하다.

전설에 따르면 880년 산 동굴에서 목동들에 의해 검은 성모상이 발견된 뒤 986년 작은 수도원을 지어 모셨다고 한다. 이후 대수도원을 건축해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가 상주했다. 1814년 나폴레옹 군대가 몬세라트를 침략했을 때 주민들이 검은 성모상을 지켜 냈고, 카탈루냐어 사용이 금지된 프랑코 독재 치하에서는 검은 성모상 앞에서 카탈루냐어로 예배를 드렸다. 수도원은 나폴레옹 침략 때 파괴됐다가 나중에 복원된 것이다. 수도원 안에는 검은 성모상을 모신 성당(바실리카·basilica)이 있는데 수도원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다.

몬세라트는 예수회 창시자인 로욜라(1491~1556)가 군인의 칼을 내려놓고 순례자의 지팡이를 든 곳이다. 하지만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 선교사들은 스페인이 남아메리카를 정복할 때 한 손에는 십자가를,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쥔 이미지로 제국주의 첨병 역할을 했다.

답사단은 서쪽으로 3시간여를 달려 사라고사에 도착했다. 사라고사는 옛 아라곤 왕국의 수도였다. 스페인은 711년부터 1492년까지 781년간 국토의 상당 부분에서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았다.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 자리한 카스티야·레온·아라곤 왕국 같은 기독교 왕국들은 지속적으로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를 벌였고,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을 함락하면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다.

한편 1459년 카스티야 왕국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 페르난도 2세의 결혼으로 통일되면서 스페인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무데하르와 고야, 내전의 아픔 안은 사라고사

사라고사는 필라르 성모성당(바실리카)으로 이름난 곳이다. 역시 성모에 관련된 전설을 안고 있다. 스페인의 수호성인이자 예수의 제자 야고보(스페인어로 산티아고)가 기독교를 전파하러 스페인을 찾았을 때 대리석 기둥(필라르)에 성모가 나타나 그곳에 제단을 지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필라르 성모성당 중앙제단 뒤로 가면 성모가 줬다는 기둥이 나온다. 이곳에 입을 맞추거나 만지고 기도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하니 너도나도 줄을 선다.

이슬람 도시였으나 레콩키스타로 기독교 도시가 된 사라고사는 두 양식이 조합된 아름다운 무데하르 양식을 뽐낸다. 필라르 성모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대성당(카테드랄·Catedral) 벽면은 정말 아름다운 무데하르 양식으로 장식돼 있다. 한때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를 배제하지 않고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여 아름다운 문화로 꽃피우는 힘이야말로 스페인의 본모습인 듯했다.

사라고사는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고야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다.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로 활동했지만 왕가와 귀족만이 아닌 부패한 시대상과 비참한 민중의 모습을 과감히 그린 천재 화가였다. 프랑스군 침공 때 왕은 나라를 버리고 떠났지만 민중은 남아 저항하다 처형당하는 모습을 그린 <1808년 5월3일 마드리드>가 대표작이다. 필라르 성모성당에는 고야가 그린 <순교자들의 여왕>을 포함한 프레스코 천장화 2점이 있다.

사라고사는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국 입장에서는 뼈아픈 곳이다. 내전 초기에는 모로코에서 진격하는 프랑코 외에 반란군 진영 장군과 장교들이 각 도시 점령을 시도했다. 사라고사 주정부가 미적거리는 사이 카바네야스 장군이 반란군 지지를 선언하고 무방비 상태에 있던 노동자들을 참혹하게 학살해 버렸다.

게르니카의 비극은 결코 잊히지 않았다

답사단은 10월3일 하이라이트인 게르니카로 향했다. 스페인 내전의 상징이 된 게르니카. 1937년 4월26일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국 진영에 있던 스페인 북부에 위치한 바스크 지방 소도시인 게르니카에 나치 독일의 콘도르 사단이 폭격을 퍼부었다. 프랑코군이 북부지역을 점령하려고 전력을 다하던 시절이었다. 북부지역은 산업도시가 밀집해 노동자 세력이 강하고 더군다나 바스크 정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바스크의 주도인 빌바오와 게르니카 등 인근 지역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파악한 것이다.

전쟁을 준비하던 독일은 게르니카를 사실상 ‘무기 시험장’ 삼아 신무기를 마음껏 투하했다. 게르니카는 인구의 3분의 1인 1천654명이 숨지고 889명이 다쳤다.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됐다. 이는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작품 <게르니카>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생각보다 너무 조용하고 깨끗하네요. 게르니카 폭격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답사 참가자들의 반응이다. 당황스럽다는 반응도 나왔다.

게르니카 의회가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본 모습은 한적한 시골마을 그 자체였다. 흔적이 완전히 지워진 것일까.

김진웅 가이드는 “게르니카 폭격 당시 언덕에 있는 의회와 성당 등은 화를 면했다”며 “아래쪽 마을에 폭격이 가해져 수많은 민간인이 죽어 갔다”고 말했다.

그런데 게르니카의 비극을 목도한 증인이 있었다. 게르니카는 바스크 지방의 신성한 지역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게르니카 의회에는 바스크 민중의 상징인 신성한 참나무가 보전돼 있었다. 지금의 참나무는 지난해 심은 것으로 1700년에 심었던 1세대 나무의 DNA를 이은 손녀 나무다. 1세대 나무는 고목(枯木) 형태로 의회 정원에 있다.

게르니카 의회는 안내서에서 2세대 참나무 사진을 두고 “1860~2004년 존재했던 2세대 나무는 1937년 게르니카 폭격의 증인”이라고 소개했다. 게르니카 평화박물관(Museo De La Paz De Gernika)도 당시 참상을 다양한 모습으로 생생하게 보여 준다고 한다. 아쉽게도 답사단이 찾은 날이 박물관 휴관일이었다.

게르니카 시내 한 병원 담벼락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타일로 묘사돼 있었다. 게르니카는 그날의 비극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고 웅변하듯이.

<하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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