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지난 주말 사흘을 제주도에서 보냈다. 매년 한 차례씩 하는 제주 역사기행 프로그램을 위해서다. 제주는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리고 미국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지슬은 감자의 제주도 사투리)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봤다. 2013년에 오멸(본명 오경현) 감독이 제작한, 제주 4·3사건을 배경으로 한 흑백영화다. 유명한 배우의 출연은 없다. 그래도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우수한 영화다. 제주 출신 배우들이 제주도 사투리로 연기한다. 그래서 국산영화임에도 한국어 자막이 나온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는 중간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미국이 그 영화의 마지막 자막에 나타난다. “민간인 학살 배후에는 미군정과 미군고문관이 있었고, 그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학살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라고.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사건법)이 제정되고, 2003년 4·3 진상규명보고서가 채택되고, 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가를 대표해 국가폭력에 의한 양민의 부당한 희생에 대해 사과와 유감을 표했다. 그리고 2013년 국회는 4·3사건법을 개정해 4월3일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제주시 봉개동 거친오름 기슭에 있는 평화공원 내 평화기념관 ‘역사의 동굴’을 지난 자리에 위치해 있는 백비(白碑)는 그 기념관이 지어진 2008년 이래 계속 저 높은 곳에서 빛이 들어오는 작고 둥근 구멍 아래에 누운 채로 있다. 그 백비는 4·3사건에 대해 이름조차 정식으로 짓지 못했기 때문에 검은 글자 하나 없이 흰색 일색으로 그렇게 누워 있다. 이것은 4·3사건법을 제정한 김대중 정부와 4·3 진상규명보고서를 정부 이름으로 발표하고 국가를 대표해 대통령이 사과와 유감을 표명한 노무현 정부 등 민주정부들의 공로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들은 진상을 조사하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보고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4·3평화공원의 기념관에 비석이 저렇게 백비로 누워 있을 수 없다.

87년 체제를 바꿔야 한다고들 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왜 바꿔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여와 야가 비타협적으로 대립하는 체제는 더 이상 자본을 위해 순기능을 하지 못하므로 부르주아 계급이 협치(協治)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 87년 체제가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많아서 바뀌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방향은 전혀 반대다. 그 체제는 부르주아 양당에 의한 권력 분점과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독재체제다. 그 체제는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계급구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정치적으로 대표해야 하고 대표한다. 그래서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항상 소모적으로 대립하고,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항상 무원칙하게 타협한다.

제주 4·3사건과 관련해 말하자면, 4·3 백비를 그냥 둘 것이냐 아니면 일으켜 세울 것이냐의 문제다. 극우세력 일부가 민족 자주·통일 지향 세력을 폭도로 규정하며 4·3평화공원에서 추방시키자고 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계급적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백비를 그대로 둔 채 민중들의 민족 자주·통일 지향에 대해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계급적 이익에 적합하다. 이것이 광주항쟁 희생자들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 대비되는 제주 4·3 희생자들에 대한 부정적 태도의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 민중의 선택은 무엇인가. 무릎을 꿇는 것인가, 아니면 지배계급과 싸워 진실을 제대로 밝혀서 누워 있는 백비를 곧게 세우는 것인가.

제주에는 지금 전쟁의 광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강정 해군기지 공사는 금년 초 완공됐다. 군인 가족과 독신자 아파트까지 지어졌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12월 해병 9여단이 새로 창설됐고 제주시 안에 예하 포병대 신설도 추진되고 있다. 강정 해군기지는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7년 5월 추진이 결정된 사업이다. 또 성산포 지역에 비행장 건설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 이 비행장에 대해서는 일반 비행장을 짓는다는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B2나 B52 같은 전략폭격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군용 비행장을 짓는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있다. 활주로 길이 3천250미터가 그런 의심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결국 제주도는 지금 섬 전체가 미군의 군사기지가 되는 한국판 오키나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강정 해군기지는 이를 위한 전초작업이었던 것이다.

제주도의 운명은 이처럼 풍전등화다. 노무현 정부의 ‘평화의 섬’ 선포는 신기루가 되고, 또다시 일제 말이나 4·3사건 때처럼 미국 또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전쟁기지로 급전직하할 상황이다. 이것은 단지 제주도민들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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