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지난 23일 오전 수도권 지하철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은 늦도록 직장인들로 붐볐다. 출근 시간이 훌쩍 지난 10시가 넘도록 사람들은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전철 안에서, 혹은 계단에서, 처음 보는 듯한데도 서로 “오셨어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일찍 출근해 오래 일하기로 유명한 금융노동자들이었다.

평일 늦은 오전에 그토록 표정이 여유로웠던 까닭은 이날 전국의 모든 금융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금융노조(위원장 김문호)가 성과연봉제 저지를 위한 하루 총파업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했다.

부당노동행위 뿌리치고 현장에 모인 조합원들

대회장을 들어서자 서울월드컵경기장 동문 스탠드에 나란히 걸린 대형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먼 길 달려오신 조합원 동지 여러분, 뜨겁게 환영합니다.”

입장시각은 오전 9시였지만 이후 2시간여 동안 연이어 사람이 들어찼다. 그런데 고용노동부는 이날 오전 10시를 기준으로 "파업 참여인원은 1만9천여명"이라고 발표했다. 나기상 노조 교육문화홍보본부장은 “여러 언론이 정부 발표에 따라 보도한 파업 규모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며 “지부별 파업 참여인원을 합산하면 7만5천명으로, 금융노조 사상 최대 규모의 조합원이 참여한 총파업이 성사됐다”고 말했다.

"금융노동자 총단결로 임단투 승리하자."

"해고연봉제 관치금융 총파업으로 분쇄하자."

구호를 연습하는 사전행사로 집회가 시작됐다. 사회를 맡은 최우미 노조 여성본부장은 “지금 모두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봅시다”라고 외쳤다. 주요 포털 사이트에 ‘금융노조 총파업’을 검색하는 사이버 홍보활동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날은 일터를 지켰지만 27일부터 파업에 나서는 공공운수노조도 조합원들과 함께 ‘금융노조 총파업 지지 온라인 행동’에 나섰다.

파업 기사에 응원의 댓글을 달고 SNS로 퍼뜨렸다. 덕분에 ‘금융노조 총파업’은 하루 종일 주요 포털에서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올랐다. 최 본부장은 “파업 관련 기사를 지지하는 국민의 댓글이 쇄도하고 있다”며 “우리의 투쟁은 외롭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전 11시께 본행사인 결의마당이 시작됐다. 노조 깃발 입장에 앞서 이례적으로 단위 노조 위원장에게 마이크가 주어졌다. 회사의 노골적인 파업 방해행위를 규탄하기 위해 나기수 기업은행지부 위원장이 무대에 올랐다. 그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너무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지점장들이 파업 불참 각서를 쓰게 하고 조합원들을 퇴근하지 못하게 하고 은행에 가뒀습니다. 오늘은 서울로 오는 지방버스를 지점장이 차를 몰고 따라오기까지 했고요. 기업은행뿐만이 아닙니다. 지난밤 대부분의 은행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동료와 노조를 지키겠습니다.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노조는 보도자료를 통해 파업 전날 기업은행을 비롯한 신한은행·NH농협은행이 파업 참여를 방해하는 부당노동행위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무대에 오른 수많은 연사들은 “갖은 탄압을 뚫고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이 자랑스럽다”고 입을 모았다.

"성과연봉제 탓에 취업해도 걱정이에요"

이날 파업 집회에는 NH농협지부 조합원들이 가장 많이 참여했다. 신용보증기금지부는 좌석마다 조합원 이름을 적어 놓은 지정좌석제를 운영해 실근무자 전체에 가까운 인원이 파업에 참여하는 기염을 토했다. 신용보증기금에 입사한 지 10년이 조금 넘었다는 이아무개씨도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성과연봉제가 도입되면 공공기관의 정체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지금도 그러는데 정권 눈치를 얼마나 많이 보겠어요. 중소기업 자금지원 기능은 약화하거나 특정 기업에만 지원되는 쏠림 현상이 우려됩니다. 과반수 노동자가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자기들끼리 제도가 도입됐다고 주장하는데, 노동탄압 아닌가요?”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 수학과를 졸업하고 올해 NH농협은행 신입사원이 된 김희철(가명)씨는 "성과연봉제 탓에 어렵게 성공한 취업에도 왠지 모를 불안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과연봉제를 해고연봉제라고 부르는 노동계 주장에 공감한다고 했다. 김씨는 “이제 막 회사에 와서 열심히 일을 배우고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우고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인데 성과연봉제가 도입되면 내 일자리에 무슨 문제가 생길 것 같아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청년들도 성과연봉제 대상인데 정부는 청년층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아요. 일하는 내내 성과 압박에 시달려야 할 텐데…. 정부의 탁상행정으로 취업할 때도 피해를 보고 취업해서도 피해를 보네요.”

파업 집회 현장에 자매처럼 앉아 있었던 최혜선(가명)씨와 김선아(가명)씨. 둘은 대구은행 한 영업점에서 근무하는 10년 터울 선후배 사이다. 새벽 4시 대구은행지부가 마련한 파업행 버스를 탔다.

김씨는 “성과연봉제가 도입되면 공과금을 내러 온 손님들에게도 영업을 하게 될 수도 있다”며 “담당업무에 따라 성과가 다르게 매겨질 거 같은데 오히려 부작용이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씨는 “1년차 신입인 만큼 선배 은행원들로부터 업무를 배우고 있는데, 성과연봉제가 도입돼 실적경쟁이 심해지면 선배들에게 업무 노하우를 어떻게 물어볼까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9·23 총파업 계승하는 2·3차 파업 '시동'

노조는 오전 11시를 기해 총파업을 선포했다. 김문호 위원장은 대회사에서 “어떤 경우에도 절대 성과연봉제에 합의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을 경우 10만 금융노동자의 분노와 눈물을 모아 더욱 가열찬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양대 노총은 지원사격을 했다.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은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금융·철도·의료부문 총파업이 현실화했는데도 정부는 아무런 답변이 없다"며 "박근혜 정권은 행정독재를 즉각 멈추고 노동계 요구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내놓으라"고 촉구했다.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해고요건을 강화하겠다던 박근혜 정권이 관치금융으로 망친 금융산업에 성과연봉제를 강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27일부터 총파업에 돌입하는 민주노총과 함께 2천만 노동자의 명운을 걸고 성과노예 제도를 반드시 저지하자"고 밝혔다.

점심식사 후 이어진 승리마당에서는 가수 노라조·바다의 문화공연과 지부 위원장들의 투쟁사가 펼쳐졌다. 노라조는 무대 중간에 “우리의 엽기적인 모습에 모두가 외면했지만 기술보증기금지부만 회사(소속사)를 도와줘 살 수 있었다”는 농담을 던져 웃음을 자아냈다.

김대업 산업은행지부 위원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10대 공약 중 6번째가 해고요건 강화인데 결국 대국민 사기극으로 판명났다”며 “내년엔 모두가 승리하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대선을 치르자”고 호소했다.

파업 집회는 조합원 총회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총회는 9만5천여 조합원 중 7만5천여명이 참석해 성원이 됐다. 조합원들은 노조의 투쟁계획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참가자들은 “9·23 총파업을 계승해 다음달부터 2·3차 총파업을 포함한 쟁의행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이라며 “관치금융 철폐와 성과연봉제 같은 성과문화 확산 저지를 위해 대정부·대사용자 투쟁에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매진할 것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양우람·구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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