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이 아니라 전쟁터가 되는 거예요.”

A은행에서 전산업무를 담당하는 김민수(가명·44) 차장의 말이다. 정부 주도로 추진되는 은행권 성과연봉제 확산에 대한 생각을 묻자 이같이 답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입사해 20년 넘게 근무한 김 차장은 “직원들의 협업으로 굴러가는 은행이라는 조직에 성과연봉제는 부적절하다”고 잘라 말했다. 조직 내 과도한 경쟁이 조직문화를 각박하게 만들 것이라는 얘기다.

“영업점 분위기가 가족적이면 해당 점포의 성과도 함께 높아집니다. 영업점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의기투합하니까요. 옆에 직원이 야근하면 함께 도와주고, 시재가 틀리면 같이 찾아 주고 하는 식이죠. 그런데 일반 직원까지 성과연봉제가 확산되면 이런 문화부터 사라지지 않을까요. 동료를 도와주면 내 월급이 깎이는데 누가 선뜻 나서겠습니까.”

경쟁과 성과가 강조되는 조직문화가 오히려 성과 창출에 부정적이라는 얘기다. 국내외 여러 연구결과는 이 같은 우려를 뒷받침한다. 린다 그래튼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기업 활동이 복잡해지고 혁신의 중요성이 증대될수록 구성원 간 경쟁보다는 협력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B은행 본점에서 근무하는 이미연(가명·47) 차장은 은행권 성과연봉제 확산이 노동자들의 건강에 미칠 부작용을 걱정했다. 성과가 강조될수록 노동강도가 세지고, 직원들이 고객을 상대하며 감내해야 하는 감정노동의 크기 역시 커질 것이라는 얘기다.

“외환위기 이후 인수합병을 거쳐 은행의 덩치가 커지면서 업무량이 많이 늘었어요. 예금업무 외에 카드·펀드·방카슈랑스·IS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까지 팔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업무실적에 따라 1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우겠다는 거잖아요.”

금융경제연구소가 2014년 은행원 3천776명을 대상으로 감정노동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 77.8%가 직장내 스트레스 원인으로 “영업실적·경영평가 등 성과주의 조직문화”를 꼽았다. 또 응답자 44.8%는 “성과평가 시스템이 감정노동의 원인이 된다”고 답했다. 성과연봉제 확산이 노동강도와 감정노동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전망을 뒷받침한다.

‘여행원 제도’가 폐지되기 전 입사한 이 차장은 직장내 여성 차별을 상징하는 ‘유리천장’을 톡톡히 경험했다. 첫 아이를 출산한 뒤 산전후휴가 석 달만 쉬고 남들 다 쓰는 육아휴직도 포기했지만, 승진은 남자 동기들의 몫이었다. 야근도 마다않고 일에 몰두했던 그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최근 친한 여자 후배가 결혼을 앞두고 후선업무에 배치됐어요. 결혼하는 것도 흠이 되는 조직에서 누가 아이를 낳으려고 하겠어요? 이러면서 저출산 운운하는 건 모순이죠.”

그는 성과가 강조될수록 출산과 육아를 병행하는 여성들은 점점 더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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