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소선 어머니가 영면하신 지 올해로 5주기를 맞았다. 살아생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로, 이 땅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고난의 삶을 살아오신 이소선 어머니. 어머니의 한결같은 바람은 “뭉쳐야 산다. 그래야 이긴다”였다. <매일노동뉴스>는 30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리는 ‘이소선 어머니 5주기 토론회’를 앞두고 6회에 걸쳐 연속기고를 게재한다.<편집자>
 

▲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

50명 정도의 조합원으로 시작한 청년유니온의 출발은 최저임금 운동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편의점에서 일하는 청년들을 만나 실태조사를 하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같은 시기에 나는 커피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비슷한 처지의 노동을 하는 동료·시민들을 만나는 시간은 의미 있는 일이면서, 한편으로는 고된 일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매장으로 들어와서 설문조사에 참여해 달라고 하면 쉽게 응하기 어렵다. 세 곳에서 정중히 거절을 당하면, 한 곳에서는 설문조사를 받을 수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500여명의 편의점 직원의 삶으로부터 어렵게 모은 종이들은 어수룩한 계산을 거쳐 여러 언론사에 보내졌다. 나는 보도자료라는 단어를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그리고 의구심을 느꼈다. ‘고생하긴 했지만, 전문적인 연구자들이 쓴 자료도 아닌데 이게 뉴스에 나간다고?’ 그런데 정말로 뉴스에 났다. 많이 나갔다. 이 과정을 함께 한 동료들은 이 세상에 우리들의 목소리가 알려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뛸 듯이 기뻐하고, 또 신기해했다. 조합원들은 기사가 난 신문들을 모으고 오려서 스크랩북에 모았다.

그해 말인가, 다음해 초인가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평화시장에서 167장의 설문지를 받고 그것이 신문에 큼지막하게 나고, 300장의 신문을 사서 돌렸던 들뜸의 시간을 읽었다. “군데군데에 노동자들이 몰려서서 신문 한 장을 두고 서로 어깨너머로 읽으면서 웅성거렸다. 평화시장의 오랜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신문이라고 하는 것은 높은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 바로 그들이, 바로 그 신문에 하찮은 쓰레기 인간들인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이라도 하듯 실려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통곡과 탄식과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전태일 평전> 중)

평전을 통해 접한 전태일의 삶에서 들뜸의 웅성거림이 차지하는 비중은 길지 않다. 자신보다 열악한 처지의 어린 노동자에게 건넨 풀빵 한 조각의 따뜻한 마음은 바보회 결성으로 이어졌지만, 좌절의 시간이 더 깊다. 정부당국과 사업주의 외면과 탄압보다는 동료 노동자들의 냉소가 그의 가슴을 더 아프게 짓눌렀을 것이다. 그건 외로움이라 표현하는 게 적절하겠다. 잠시 평화시장을 떠나 삼각산에 올라간 그는 평범한 삶에 대한 번뇌를 느끼다가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맹세를 남긴다. 숨을 거두기 직전 자신의 어머니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가 ‘배가 고프다’라니. 지독하리만큼 인간적이다. 어느 겨울의 노동자대회, 나는 집회 현장의 먼 발치에서 이소선 여사의 음성을 들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본 것은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니라 역사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뎌 온 노동운동가였다.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89년 19.8%를 정점으로 그 이후 급격히 감소해 오늘날 10%대의 장기 침체에 빠져 있다. 사업장 규모에 따른 조직률 격차는 더욱 심각하다. 300명 이상 사업체의 조직률은 61%인데 반해, 30~99명은 1.5%, 30명 미만은 0.2%에 그친다. 여성노동자 조직률은 5%로 전체 평균의 절반 수준에 머물러 있고, 전체 임금노동자의 45% 수준에 달하는 비정규직의 경우 노동조합 조직률이 1.7%에 불과하다. 저임금·불안정 일자리에 내몰린 청년들은 노동조합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소선 여사가 강조한 ‘노동의 단결’은 ‘서로 다름’ 속에서 빛나는 것이지만, 오늘날 노동운동은 ‘서로 다름’을 ‘구호’로 통합하고 있다.

이해는 하지만, 나는 ‘어머니’라는 호칭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의 문화적 맥락에서 어머니는 ‘자애로운 모성을 갖춘 여성’이라는 의미로 상징화되기 때문이다. 이소선 여사가 오늘날 노동의 현실을 꾸짖으면 무어라 답할 것인가. “저희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못 난 자식을 이해해 주십시오, 어머님.”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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