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의 역할과 기능은 조합원의 권리를 지키고 조합원의 이익을 개선하는 데 있다. 여기서 조합원은 특정 기업에만 소속된 종업원일 수 있고, 특정 산업 혹은 국민경제에 속한 노동자일 수 있다. 조직체계상 기업별노조라면 종업원(employees)을 위한 조직일 가능성이 높고, 산업별노조라면 노동자(workers)를 위한 조직일 가능성이 크다. 대기업-정규직 노조를 다르게 해석하면 특정 기업의 종업원만을 위한 노조가 될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rights)와 이익(interests)을 정확하게 나누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익의 성격을 띤 권리도 있고, 권리의 성격을 띤 이익도 있다. 좋은 임금과 안전한 일터는 권리기도 하지만, 이익의 성격이 크다. 회사 정보와 사용자와의 정책협의는 이익이기도 하지만, 권리의 성격이 크다. 사전을 보면, 권리는 “어떤 일을 행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을 말한다. 이익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탬이 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대표적인 이익으로는 임금이 있고, 좀 더 넓게 보면 노동시간이나 안전보건 따위의 노동조건도 이익에 포함된다.

헌법에 명시된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은 노동자를 위한 대표적인 권리다. 이 세 개의 꼭짓점이 균형을 이룰 때 노동자 권리라는 삼각형은 튼튼해진다. 세 꼭짓점 가운데 으뜸은 단체교섭권이다. 노동자들이 떼를 지어 단결을 하는 이유는 교섭을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이 떼를 지어 행동하는 이유도 교섭을 위해서다. 떼를 지어 교섭할 권리, 즉 단체교섭권은 노동 3권의 정점에 선다. 단체교섭을 통해 노동자들이 얻으려는 것은 노동자의 이익이다. 역사는 노동자가 자신의 이익을 개선하기에 앞서 자신의 권리를 얻어야 했음을 보여준다. 이익의 개선은 권리의 보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며 발전해 왔다.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은 서로를 밀고 당기며 성장했다.

하지만 굳이 앞뒤를 따지자면 무엇이 더 중요할까. 이익일까 권리일까. 이는 단체교섭(collective bargaining)에서 ‘단체’와 ‘교섭’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할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물론 단체교섭에서 말하는 단체는 노동자들끼리의 떼를 말하는 것으로, 사용자의 것이라고는 머리카락 한 올도 들어 있지 않은 개념이다. 역사적으로 개념적으로 단체교섭은 선후가 분명하다. 단체가 없으면 교섭도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사용자와 일대일로 교섭할 수 있었다면 단체교섭이 권리가 되진 않았을 게다. 현실적으로 개인별교섭은 노예계약에 다름 아니었고, 노동자 개인과 교섭하는 사용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 어디에서나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위한 이익을 요구하고 교섭하기 위해 떼를 지어야 했고, 그것이 20세기 들어 권리로 인정돼 단체교섭권이라는 고상한 이름을 얻은 것이다. 단체교섭권의 본질은 노동자들이 ‘떼’를 지어 ‘떼’를 쓰는 데 있다. 앞의 떼는 “목적이나 행동을 같이하는 무리”고, 뒤의 떼는 “부당한 요구나 청을 들어 달라고 고집하는 짓”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역사적 요구는 노동자 권리의 완전한 쟁취였다. 노동 3권, 특히 단체교섭권의 완전한 쟁취였다. 1948년 제헌헌법 이후 문자로만 남았던 노동자의 권리를 모든 일터에서 실현하는 것이었다. 노동자의 권리를 부정하고 훼손하는 법률을 폐기·개정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증진하는 법률을 제정·개정해야 했다. 또한 노동자들이 생애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터에서 노동자 권리가 보장·실현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87년 민주노조운동의 1세대가 역사적 과제로 내세웠던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조직적 과제와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정치적 과제는 노동자 권리의 실현이라는 전략적 목표와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했다.

하지만 지난 사반세기 동안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권리보다는 이익에 집중해 왔다. 개선된 이익을 통해 얻은 자원과 힘을 권리의 쟁취에 집중해야 했으나, 이익 개선과 권리 쟁취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이로써 종업원으로서의 이익 개선과 노동자로서의 권리 개선에 간격이 생겼고, 노동조합의 역할과 기능이 전체 노동자가 아닌 특정 기업에 속한 종업원의 이익을 개선하는 데로 협소화됐다. 98년 2월 보건의료노조를 필두로 한 산별노조운동이 없었더라면, 한국의 노동조합은 기업별노조주의 늪에서 허덕이다가 기업별 종업원 조직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노동조합운동 주체의 측면에서 볼 때 87년 노동체제의 결정적 한계는 노동 3권, 다시 말해 제대로 된 단체교섭권 획득에 실패한 데 있다. 노동조합운동이 권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학습이 없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일터 밖에서는 법·제도로, 일터 안에서는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으로 노동자들이 일하고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씨줄과 날줄로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익을 튼튼하게 짜지 못했던 것이다. 권리의 씨줄이 부실하면 이익의 날줄도 부실할 수밖에 없다.

내년이면 '87년 노동자 대투쟁' 삼십 년이다. “권리 없이 이익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이라는 노동기본권의 삼각형을 어떻게 제대로 그려 낼지, 나아가 그 삼각형의 터 위에 노동해방이라는 집을 세우는 데 필요한 기둥과 벽을 어떻게 세울지에 대한 구상과 토론이 자유롭게 펼쳐질 때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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