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에서 전기원으로 일하는 염재호(58)씨는 지난 2011년 4월 뇌종양 수술을 받았다. 오른쪽 귀가 안들리고 입이 돌아가는 마비증상으로 병원을 찾은 염씨는 자신의 뇌에 7센티미터 가량의 거대종양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망연자실했다. 병원은 "직업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1991년부터 전기일을 시작한 염씨는 우리나라에 무정전공법이 들어온 90년대 초반부터 뇌종양 진단을 받기 직전까지 활선작업만 했다. 20년 가까이 2만2천900볼트의 살아 있는 전선을 만져 왔던 셈이다.

그는 "활선에서는 고무장갑을 끼더라도 온몸의 털이 서고 후끈한 느낌을 받는다"며 "전자기기에서 나오는 전자파도 안 좋다고 하는데 활선에서 나오는 전자파 때문에 몹쓸병에 걸린 것 같아 속상하다"고 말했다.

염씨는 자신과 같은 병에 걸린 동료 전기원노동자 17명과 함께 30일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요양신청을 했다. 그는 "산재승인이 나서 후배 전기원들이 보다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기노동자 18명 집단 산재신청

수십년간 살아 있는 고압전류를 손으로 만지다 암이나 뇌심혈관계질환에 걸린 전기노동자들이 근로복지공단에 집단 산재요양·요양비를 신청했다.

30일 건설노조에 따르면 산재요양을 신청한 노동자는 염씨를 포함해 18명이다. 노조가 올해 2월부터 석 달 동안 실태조사를 벌여 확인한 암·뇌심혈관계질환, 갑상선질환자 79명 중 이들이 1차 신청에 나섰다.

이들은 뇌종양(2명), 비강암(1명), 갑상선암(3명), 대장암(1명), 식도암(1명), 위암(3명), 심근경색(2명), 뇌경색(2명), 뇌출혈(1명), 무릎관절염(1명), 목뼈염좌·흉추골절(1명)을 앓고 있다. 노조는 이들이 활선에서 나오는 전자기파에 의해 발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석원희 노조 전기분과위원장은 "최근 한전이 직접활선공법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몇 십년 동안 전자파에 노출된 전기노동자들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며 "전기노동자 산재신청은 직업성 질환을 가진 모든 조합원이 합당한 조치를 받을 때까지 계속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픈 전기노동자들 "한전-노조 공동위원회 구성해야"

노조는 이날 오후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에 산재신청을 하기 전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에서 조선대병원 직업환경의학과에 의뢰해 실시한 전기노동자들의 혈액검사 결과도 발표했다.

지난달 11일부터 이달 24일까지 조합원 1천96명을 대상으로 혈액검사와 설문조사를 벌였더니 정밀추적검사와 약물치료가 필요한 갑상선 호르몬 수치 이상자(79명), 하시모토씨 갑상선염 의심자(71명)가 발견됐다. 적혈구·백혈구·혈소판 수치가 정상범위보다 낮은 '범혈구감소증', 면역력과 관계 있는 절대림프구 수가 5천개 이상 확인된 조합원은 각각 1명과 10명씩 확인됐다.

고혈압·당뇨환자는 201명으로 조사됐다. 이철갑 조선대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이런 기저질환을 가진 조합원들이 활선작업 같이 고도의 긴장상태에서 업무를 할 경우 뇌심혈관계질환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지난 1년간 근골격계질환으로 병원에서 치료받은 조합원은 728명(64.2%)에 달했다. 전기노동자들은 20~30킬로그램에 달하는 연장을 매달고 16미터 높이 전주에서 중량물을 끌어올리고 전선을 당기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들이 근골격계질환에 시달리는 이유다.

노조는 이날 한전에 '전기원 안전작업과 건강관리를 위한 공동위원회' 구성을 요구했다. 석원희 전기분과위원장은 "한전과 노조가 공동위원회를 꾸리고 전국 전기노동자 전수조사를 실시해 직업성 질환에 대한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자"고 말했다.

윤소하 정의당 의원은 "이번 건강실태조사를 계기로 한전이 노조와 전문가들과 공동위원회를 구성해 근골격계질환과 각종 직업성 암질환 문제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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