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윤성 공인노무사(성동근로자복지센터 전문위원)

알바는 아르바이트의 줄임말이고, 아르바이트는 "일하다"는 뜻의 독일어다. 이 단어가 어떻게 단시간이나 임시 일자리를 일컫게 됐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현재는 청년노동의 대표적 단어가 됐다.

얼마 전 알바노동자를 상담했다. 첫 번째는 프랜차이즈 치킨집에서 일했던 고등학생인데, 일하는 내내 사업자로부터 욕설과 폭행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체불임금과 사과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 두 번째는 카페에서 일했던 20대 초반 남성이었다.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하는 사업주의 폭행과 욕설로 인해 그만두면서 체불된 임금과 사과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갓 스무 살이 된 한 여성은 일하던 피자집 상사로부터 성적인 모욕감을 느꼈다고 상담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노무사 업무를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러한 폭행사건은 이주노동자 정도(?)나 돼야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즉 내국인끼리는 회식자리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요사이엔 심심치 않게 상담하는 사건이 돼 버렸다.

비정규직의 대명사인 알바는 실상 실업 문제이기도 하다.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하는 이들이 잠시 거치는 직업이기도 하고, 생계를 기대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알바를 바라보는 사업주들이나 외부의 시선은 차갑다. 논란의 소지가 될 수도 있지만 일종의 ‘패배자’나 혹은 ‘미성숙’한 부류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선들은 알바를 넘어 소위 ‘비정규직’으로 불리는 ‘불안정노동’ 전반으로 확산된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노동 가치를 폄하하고, 이제는 그 가치를 사람에게로 투영한다. 나와 다른 ‘그 무엇’으로 구분 짓고, 그 구분선을 근거로 인간의 존엄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자신 스스로에게도 그 포기를 정당화한다. 그 정당화를 근거로 사업주들은 물리적 폭력과 욕설을 거리낌 없이 하고, 직장 ‘동료’(라고 불리는)들은 자신들의 고역을 전담하고, 희생과 강요가 "정당하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당연히 알바라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에게 폭력과 욕설을 행사할 권리도, 받아들여야 할 의무도 없다. 문제는 그러한 권리와 의무가 하나의 명제로 우리 머릿속에 자리 잡고, 어느새 우리들 사이에 내재화됐고, 이제는 ‘그러한 구분을 짓기 시작한 사람들’ 못지않게 우리 스스로도 권력으로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구분이 필요한 사람들의 논리를 우리 스스로가 받아들이고 내재화하고 당연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난 이것을 ‘알바(로 대표되는) 혐오증’이라고 부른다.

낙수효과. 이는 미국 공화당 경제정책에 대해 민주당이 비아냥하는 레토릭이었다. 웃긴 건 우리나라에 와서는 마치 경제정책의 전범처럼 쓰인다는 사실이다. 재벌이 살아야 시민이 산다는 것인데, 미국 정가에서는 오히려 "재벌이 살아야 시민이 산다고?" 하며 비웃는 데 사용했던 이야기라는 것이다. 지금 노동에 대한 우리의 가치가 이렇게 변했다는 얘기다.

해답은 단순하다. 노동의 패러다임을 다시 바꿔야 하고, 이를 위해 다시 노동인권 교육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노동교육센터를 설립해 성인을 대상으로 한 노동인권 교육을 해야 하고, 중·고등학교 정규수업 시간에 노동인권 교육을 의무 편성하도록 해야 한다.

답은 단순하지만, 그 과정은 험난할 것이다. 우리 속에 타자화돼 있는 노동의 가치를 우리 안으로 끌어당기는 새로운 노동운동이 진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분 짓기’에 익숙한 우리를, 우리 스스로가 파괴하는 과정은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기 위한 성찰의 과정이 될 것이며,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하나였음을 자각하도록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의 출발점이 바로 사회 전반적인 노동인권 교육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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