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제105차 국제노동기구(ILO) 총회가 폐회했다. ILO는 국제기구 중 유일하게 노사정 3자 협의체다. 노동자들에게는 노동과 사회보호 기준을 정하는 여러 국제기준 중 유일하게 노동자가 ‘결정당사자’로 참가하는 절차라는 점에서 특히 각별한 자리다.

국제노동기구 총회는 노동권의 기준과 적용범위를 재정립하고 전 세계 노동환경 변화와 노동권 실태를 점검하는 장이다. 노동에 관한 국제기준이 ILO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에게 노동은 곧 삶이고, 노동의 세계를 통해 삶의 질이 결정된다. 그렇기에 어떤 국제 논의에서나 노동에 대한 언급 혹은 정리가 빠질 수 없다. 예를 들어 유엔 아동권리협약에는 일하는 부모의 아동들에 대한 보호를 정한 규정이 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은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철폐와 모성보호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최근 세계화와 다국적기업 혹은 초국적기업이 성장하고 국경을 넘는 금융과 무역이 일반화하면서, 노동자가 노동의 주체로서 최종적 의사결정에 참가하지 않는 절차로 정해지는 국제기준, 소위 ‘사적’ 기준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예컨대 ‘금융’기구인 월드뱅크는 노동시장 문제라는 관점에서 노동기준을 만들어 이를 개별 국가에 대한 융자 조건에 포함시키고 있다. 국제표준화기구(ISO)의 ISO 26000(사회적 책임 표준)은 결사의 자유 같은 노동기본권, 산업안전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에 관한 새로운 표준이다. 이외에도 OCED·G20·EU를 비롯한 다양한 주체들이 노동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기준들은 원칙적, 혹은 표면적으로는 유엔과 ILO의 노동기준을 따르고 있다.

다양한 기준의 탄생과 발전은 특히 한국처럼 노동기본권 침해가 심각하고 국내법과 국제기준 간 괴리가 큰 나라에는 일견 긍정적일 수 있다. 여러 기준 및 가이드라인과 한국 상황을 두루 비교해 살펴보면서 한국의 현재 위치를 객관적으로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준을 봐도 저 기준을 봐도 한국 상황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소중하다. 한국이 여러 국가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FTA에 보통 포함되는 ‘국제노동기준의 준수’나 ‘지속가능한 개발’에 관한 항목들이 한국의 현실을 점검하는 기회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각각의 목적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일종의 경쟁관계가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금융기관인 월드뱅크가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선언에서 출발한 국제노동기구와 같은 관점일 수는 없다. 무역장벽 완화를 통한 이익 극대화가 목표인 FTA가, 아무리 그 안에 노동권 보장을 언급하더라도 국제노동기구와 같을 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시장을 보호하려는 개입이 노동자에게 어떠한 칼날이 되는지를 이미 경험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조개혁에도 나름의 노동 관련 가이드라인이 있었지만 한국이 IMF의 조건을 수용한 결과 노동자들이 겪었고 지금까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결정적으로, 다른 기준들은 노사정 3자 협의체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고 발언을 할 수도 있고 전문위원이 참가할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노동자와 사용자, 그리고 노동자와 정부가 비교적 온전히 같은 지위에 설 수 있는 절차는 결국 국제노동기구뿐이다.

올해 ILO에서는 노사정이 함께 정립한 노동기준이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하고, 월드뱅크나 ISO 같은 다른 가이드라인이나 FTA·TPP 같은 국가나 지역의 합의에 ILO가 주도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점을 노사정 가릴 것 없이 여러 번 확인했다.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참가해 만들어 온 ILO의 기준이 세계화와 금융위기 이후 사실 그만큼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비준한 ILO 협약은 189개 중 단 29개에 불과하다. 반면 한국이 체결한 FTA는 14개, 51개국에 달한다. 한국 정부가 중시하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를 잘 보여 주는 수치다. 전 세계 노사정이 ILO 기준이 다른 모든 가이드라인의 핵심이라는 데 뜻을 모은 올해 ILO의 사회정의 선언 평가 위원회에서도 한국 정부는 침묵했다.

한국 정부는 ILO 기준을 중시해야 한다는 국제사회 논의를 따르고, 가장 우선적이고 근본적인 국제노동기준인 ILO 협약을 비준하고 권고를 이행해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성의를 보여야 한다. ILO 정이사국인 한국의 지위를 생각하면, 그것은 위엄이 아니라 정말 '최소한의 성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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