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금천구 가산동의 한 IT벤처회사 사장은 올해 4월 직원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근로계약서를 다시 쓰라고 요구했다. 근로계약서에는 "연차휴가를 공휴일로 갈음한다"는 내용이 추가돼 있었다. 이 회사는 이전까지는 공휴일에 쉬어도 유급으로 처리했고 연차휴가와 수당을 지급했다. 노동자들은 새 근로계약서가 적용되면 수당이 모두 사라지게 되지만 잘릴까 봐, 혹은 '왕따'가 될까 봐 동의서에 서명했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 구로구 구로동 한 전자부품 제조회사는 회사 귀책사유로 휴업했는데도 휴업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 지난해 퇴직자 일부가 휴업수당·연차수당을 받지 못했다며 노동부에 진정을 접수하고 나서야 수당 일부를 줬다. 그런데 회사는 이후 "휴업시 회사측 사유라 하더라도 무급에 동의한다"는 동의서를 전 직원들에게 작성하도록 했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내 다수 사업장이 노동자 동의를 받지 않거나 압박하는 방식으로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노동조건을 바꾸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민주노총 서울 남부 노동자 권리찾기 사업단 '노동자의 미래'는 2일 오전 서울 구로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관악지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부는 사용자 강압에 의한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이 횡행하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를 대상으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하라"고 촉구했다.

노동자의 미래는 올해 3월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노동자 322명을 대상으로 임금실태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사용자 강압에 의한 노동조건 불이익변경 사례가 다수 확인됐다. 최저임금 미만율도 심각한 수준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한 해 동안 공단 노동자 5명 중 1명(22.7%)은 취업규칙 변경 동의 서명을 강요당했다. 공휴일 연차휴가 대체나 정기상여금 지급 제한, 각종 수당 삭감이 이뤄졌다. 박준도 노동자의 미래 정책팀장은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은 노동자 과반수의 집단적 의사결정 방식이나 회의방식에 의한 동의를 거쳐야 가능한데도 개별 서명과 서명 강요에 따른 변경이 이뤄지고 있음이 확인됐다"며 "정부가 행정지침 등을 통해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을 완화하려 한 것이 현장에 나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공단 노동자 40%는 지난해 노동조건이 악화됐다고 밝혔다. 성과에 따른 임금 차등지급을 겪거나, 수당을 삭감당하거나, 실적평가에 따라 징계요건이 강화된 사례가 제보됐다. 전체 노동자 10명 중 1명(11%)은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전기·전자 생산직 26.9%의 급여가 최저임금 미만인 것으로 조사됐다.

근속연수 1년 미만 노동자 비율은 41.3%였다. 2011년과 지난해 같은 조사에서는 각각 47.3%와 41.9%였다. 이직이 잦다는 얘기로 그만큼 고용안정성이 낮다는 뜻이다.

노동자의 미래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노동부에 공단 사업장의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사례를 정보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임금실태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은 위법적인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며 "노동부는 최저임금법과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준수되고 있는지 공단 내 사업장을 대상으로 철저한 근로감독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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