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성과연봉제 도입을 두고서 노동조합을 갈랐다. 모두가 설립신고를 하고서 조합원들의 노동자권리를 위해 활동한다고 외쳐 왔건만 반대하는 노동조합과 이에 합의한 노동조합으로 성과연봉제를 두고서 갈라졌다. 물론 반대하는 노동조합이 다수를 차지했다. 뭐 성과연봉제 도입을 두고서만은 아니었다. 지난해 집중됐던 임금피크제를 두고서도 그랬다. 단지 그때는 합의해 준 노동조합이 다수를 차지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온 후에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킬 것이냐를 두고서도 그랬다.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를 둘러싸고도, 전임자급여 지급금지 및 근로시간면제 제도를 둘러싸고도 그랬다. 돌이켜 보면 노동자권리, 노동조합활동 보장을 둘러싸고 사용자와 대립할 때면 그랬다. 그리고 그때마다 합의한 노동조합·위원장에 대한 비난의 말은 어용이었다.

2. 그런데 오늘 우리는 다시 어용을 말하고 있다. 성과연봉제 도입을 두고서 사용자에 합의해 준 노동조합을 어용의 말로 비난하고 있다. 노사합의한 노동조합 위원장을 어용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어용, 분명히 우리의 노동조합운동에서 노동자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말인데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은 이 말을 정의하고 있지 않다. 노조법은 주요한 용어의 정의를 제2조에서 규정하고 있건만 어용은 거기서 정의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분명히 어용은 있다. 그래서 찾아봤다. '임금이나 정부가 쓰는 말 혹은 일'이라고 사전은 정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오늘 노동조합·노동조합위원장을 비난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말의 유래, 본래의 용법이고, 오늘 그 용법대로 쓰는 일은 드물다. 우리의 역사에서 마지막 임금은 죽었다. 정부가 쓰는 말이나 일을 ‘어용’이라고 여간해선 부르지도 않는다. 그래서인가. 사전은 '이익을 위해 정부나 그 밖의 권력기관에 영합해 자주성 없이 행동함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추가로 어용을 정의하고 있었다. 이 추가로 정의한 말로서 ‘어용’은 우리에게 살아 있다. 권력에 영합해서 자주성 없이 행동하는 걸 일컫는 이 ‘어용’의 말은 우리의 노동조합운동에서 빈번히 사용해 왔다. 어쩌면 우리의 노동조합운동은 어용과 반어용의 문제로 전개돼 왔다. 어용과 민주로 갈라서 이 나라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말해 왔다. 사업장 권력, 사용자 자본에 영합해 노동의 이해를 저버리고 자주성 없이 행동하는 노동조합을 두고는 어용노동조합라고 비난했다. 사용자 자본에 맞서 자주적으로 활동하는 노동조합을 민주노동조합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오늘도 말하고 있다. 어용은 어제의 말이 아니라 오늘의 말로서 우리에게 살아있다. 이렇게 ‘어용’의 노동조합, 노동조합위원장은 이 나라에서 살아 있다. 어째서인가. 도대체 이 나라에서 수십년 동안의 노동조합운동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어용’은 살아남은 것일까.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는 어용의 심리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3. 권력에 영합해 자주성 없이 행동하는 걸 말한다. 그렇게 정의하고 있다고 나는 사전에서 분명히 어용을 읽었다. 사업장의 권력인 사용자 자본에 영합해서 행동하는 이유는 묻지 않는다. 이유를 따지지 않고 권력에 영합해 자주성 없이 성과연봉제 도입에 합의하면 어용이라고 사전을 읽었다. 가장 흔한 그들의 이유는 현실이다. 원칙만을 고집할 수 없는 현실을 내세운다. 사용자 자본에 맞서 투쟁할 노동조합의 상태가 되지 못한다면서 노사합의하고, 회사 살리기를 위해서라며 노사합의를 한다. 성과연봉제 도입을 저지할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아니라면서 사용자와 합의하고, 성과연봉제를 조기에 도입하면 성과급을 더 받을 수 있다면서 실리를 내세우면서 노사합의 한다. 현실을 말하고 실리를 말한다. 그래서일까. 요샌 그들이 말하는 투쟁도 현실이고 투쟁도 실리라고 들린다. 투쟁할 의지도 없이 투쟁을 결의하고, 투쟁할 조직하지 않고 투쟁을 외친다. 사용자에 맞선 투쟁에 조합원을 조직할 노력도 없이 노동조합의, 조합원의 상태를 말하며 투쟁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회사를 위한다는 사용자의 주장을 두고서 그것이 맞는 말인지 따져 보는 게 노동조합의 일이 되고 말았다. 언젠가부터 교섭은 사용자 주장의 타당성을 두고 공방을 벌이는 자리가 됐다. 회사의 매출·영업이익·순이익을 따지는 것이 해마다 노사 간 임단협 교섭이 돼 버렸다. 노동생산성을 내세운 기업의 효율이 노사의 교섭장에 던져졌다. 언젠가부터 사용자의 경영상태가 노동조합의 교섭과 투쟁에서 주된 변수가 돼 버렸다. 현실은 어렵고 실리를 챙기는 사용자와의 합의 말고는 선택할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에겐 언제나 다른 선택은 남아 있지 않았다. 조합원을 위해서 사용자와 임금피크제 도입에 합의할 수밖에 없는 선택만 남았고, 조합원을 위해서 사용자와 성과연봉제 도입에 합의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만 남았다. 어용의 길 말고는 다른 길은 없었다.

4. 그러나 자주성을 잃게 되면 더는 주체일 수가 없다. 다른 주체와 구분, 독립됨으로써 주체가 된다. 그러니 권력에 영합해 자주성 없이 행동하는 어용은 권력의 아류 혹은 그 일부일 뿐이다. 사업장의 권력, 사용자에 영합해 자주성 없이 행동하는 어용은 사용자의 아류 혹은 그 일부일 뿐이다. 어용은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이렇게 어용을 파악하고서 보니 우리의 세상은 어용이 판을 친다. 온갖 것들이 다 어용이다. 권력에 영합해서 행동하는 것투성이다. 국가·단체에서, 노동조합에서조차도 권력에 영합해서 행동하는 자들투성이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자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아무리 그래도 조합원의 노동자권리를 위한 노동조합운동을 말하고 있는 한, 우리는 어용으로 사용자로부터 노동조합을 말할 일이다. “근로자가 주체가 돼 자주적으로 단결해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기타 근로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라고 노동조합을 정의하고 있는 한(노조법 제2조제4호), 자주성을 잃게 되는 어용노동조합을 경계할 일이다. 이렇게 법은 분명하게 사용자에 영합해 자주성 없이 행동하는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이 아니라고 정의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법은 어용은 노동조합이 아니라고 분명히 규정하고 있으니 우리는 스스로 자주성 없이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5. 2016년 상반기, 이 나라에서 공공기관 노동조합의 시간은 성과연봉제 반대와 더불어 흘러갔다. 사용자에 맞서 반대를 조직해서 투쟁했고, 성과연봉제 도입에 합의해 준 노동조합은 많지 않았다. 노사합의, 노동자 동의를 종용하던 권력자들·사용자들은 노사합의, 노동자 동의 없이 성과연봉제 도입해야 했다. 적어도 성과연봉제 도입을 둘러싸고는 현실을 말하며 실리를 챙긴다며 사용자에 영합한 노동조합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성과연봉제는 기존의 임금제도를 변경해야 할 사안이다. 임금제도를 정하고 있는 근로계약, 단체협약 등을 변경할 문제이다. 노사합의 할 사안이고, 당사자 일방이 변경할 문제가 아니다. 투쟁을 말하며 도입에 반대한다고 목이 터져라 외쳐야 할 사안도 아니다. 조합원을 저성과자로 취급해서 그 임금권리를 삭감할 성과연봉제 도입에 합의해 주는 자를 바보라고 말할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언제부터였던가. 노동자권리를 제대로 알기만 해도 이 나라에서는 어용을 면할 수 있다. 그런데도 현실을 말하며 실리를 말하면서 노사합의를 변명한다면 위에서 한 말 말고 나는 뭐라 더 할 말이 없다. 그저 법이 정의한 노동조합을 다시 한 번 읽고 싶을 뿐이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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