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자베스 비제-르브룅, <마담 디트>, 1832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 이유리 <검은 미술관> 저자

이 그림은 프랑스의 궁정화가였던 엘리자베스 비제-르브룅(1755~1842)이 77세 되던 해 완성한 것이다. 그림 속 모델인 마담 디트는 본명이 루시 가르니에다. 1793년에 태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남편은 장교이자 ‘피닉스’보험회사 설립자인 샤를-오너 디트였다. 풍족한 집안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지냈던 그녀는 어느 날 자그마한 체구의 노화가에게 자신의 얼굴을 맡긴 채 앞에 앉았다. 외조모의 친구가 바로 노화가 비제-르브룅이었기 때문이다. 비제-르브룅은 왕년에 아주 잘나갔던 화가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때 그녀는 이미 ‘칠순 넘은 노인’이었다. 필력이 예전만할까 의심될 법했지만, 비제-르브룅은 이 우려를 불식하듯 마담 디트의 모습을 유려하고 따뜻하게 그려 냈다.

이 작품은 현재까지 비제-르브룅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록돼 있다. 다른 이들 같았으면 이미 붓을 놓았을 노년에도 왕성한 활동을 자랑하며 현역으로 지냈던 비제-르브룅. 하지만 ‘친구 손녀’의 초상화를 그려 줄 만큼 평화롭게 지내기까지 그녀가 치러야 했던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어쩌면 이 ‘평범한’ 초상화가 탄생한 것도 요행이었다. 자칫했다면 그녀는 단두대의 이슬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제-르브룅은 어떻게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끈질기게 화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비제-르브룅은 1755년 4월16일 파리에서 초상화가인 루이 비제와 전직 미용사인 잔 사이에 태어났다. 화가의 딸로 태어나서인지 그녀의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꽃을 피웠다고 한다. 비제-르브룅은 당시 소녀들이 받아야 했던 ‘윤리와 사회적 품위’에 대한 교육보다는 미술에 관심을 더 보였고, 따라서 그녀의 책 귀퉁이는 쉬지 않고 연필을 놀린 흔적이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비제-르브룅은 15살 무렵 어느새 유명화가가 돼 있었다. 그녀는 그림으로 온 가족을 먹여 살릴 정도로 놀라운 재능을 표출했고 그에 비례해 평판은 빠르게 퍼져 나가 프랑스 귀족들의 그림 주문이 끝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성화가가 거의 전무하던 시대에, 특출 난 재능과 미모에 학식을 겸비하고 활달한 성격까지 갖춘 ‘여성화가’가 눈에 띄었던 건 거의 필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새 그녀는 왕실 최상층 귀족들의 주문을 도맡았고 마침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가장 총애하는 화가가 됐다.

비제-르브룅이 평생 존경하며 진심으로 따랐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778년. 이때부터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20점이 넘는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비제-르브룅은 왕비와 단순히 화가와 주문자의 관계가 아니라 사적인 대화까지 스스럼없이 나누는 친밀한 관계가 됐다. 비제-르브룅은 세상에서 가장 매력 없다고 평가되는 사람조차 내면의 아름다움을 끄집어내 재현하는 신기한 재능이 있었다. 그녀의 능력은 앙투아네트 왕비의 초상화에서 꽃을 피웠다. 이러한 ‘내면을 꿰뚫는’ 그림으로 인해 비제-르브룅은 왕실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됐다. 심지어 그녀가 그린 앙투아네트 왕비의 초상화를 칭찬하며 프랑스 왕 루이 16세는 “짐은 그림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대를 통해 그림을 사랑하게 됐노라”고까지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당연히 상류층 고객들의 주문도 줄을 이었다. 그녀는 초상화를 그리기 전 항상 모델과 공감대를 형성한 후 자신의 주관에 따라 모델의 패션을 재구성하는 특유의 초상화 작품들을 남겼다. 이렇듯 여성화가가 없던 당시에 어떤 남성화가보다도 성공한 그녀였지만, 탄탄대로는 어느새 끝이 보이고 있었다. 1789년 바야흐로 그 유명한 프랑스혁명이 시작됐던 것이다.

비제-르브룅은 혁명이 발발하기 직전의 상황을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에투알(파리 서쪽 변두리)의 장벽에 모여 있던 하층민들이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살벌하게 모욕했다. 이 딱한 사람들은 마차 발판 위로 뛰어오르면서 이렇게 외쳤다. ‘내년에는 당신네가 마차 뒤로 가고 우리가 거기 앉아 있게 될 거야!’ 이런 식으로 수천가지 모욕적인 험담을 내뱉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상상이 가겠지만 저녁 내내 모두를 슬프게 했다.”

이제 프랑스는 그녀가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귀족과 맺었던 관계, 궁정에서 누린 총애만으로도 비제-르브룅에게 ‘혁명 프랑스’는 위험한 곳이었다. 집 창고에 유황이 날아들기도 하고 그녀가 창가에 모습을 나타내면 길가에 있는 사람들은 주먹질하며 겁을 줬다. 무리도 아니었다. 비제-르브룅은 열렬한 왕당파이자 일편단심 마리 앙투아네트 지지자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도망쳤다. 10월5일 봉기한 민중이 베르사유로 쳐들어가 왕과 왕비를 파리로 끌고 왔던 밤, 비제-르브룅은 자신이 벌어들인 저택과 재산을 놓고 단 20프랑만 몸에 지닌 채 허둥지둥 떠났다.

그때부터 비제-르브룅의 기나긴 망명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그녀가 화가로서 더욱 성공할 기회를 가져다주는 역설적 결과를 불렀다. 도피생활 동안 비제-르브룅은 이탈리아·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등 유럽 전역을 떠돌았는데,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은 그녀가 가는 곳마다 환영했고 앞다퉈 그림을 주문했다. 각 도시에서 자기 고향을 명예롭게 할 기회라며 유명화가를 반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비제-르브룅이 조국 밖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을 때, 프랑스의 상황은 급격하게 혁명 전처럼 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1799년 나폴레옹의 통령정부가 들어서자 비제-르브룅은 프랑스 귀환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마침 255명의 예술가들이 “훌륭한 재능을 보호해야 위대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며 비제-르브룅의 귀국을 청원하기까지 했다. 결국 1802년 그녀는 통령정부의 한 관리로부터 안전을 보장한다는 회신을 받고 파리로 돌아왔다. 12년 만이었다.

다시 돌아온 파리는 예전의 그 파리가 아니었지만, 비제-르브룅은 여전히 프랑스를 떠나기 전과 다름없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열렬한 왕당파였고, 전과 같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리워하고 존경했다. 비제-르브룅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순교’해 승천한 성자 같은 모습으로 묘사한 <왕비의 승천>을 그렸다. ‘왕실의 명예’를 되살리겠다며 무려 3권에 달하는 <비제-르브룅의 회고록>을 쓰기까지 했다. 그녀는 81세 되던 1835년부터 1837년까지 회고록을 계속 출판했고, 이 책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와 왕실 사람들을 적극 비호했다. 그리고 책은 대중의 큰 인기를 끌었다.

회고록 집필을 끝으로 자신의 해야 할 도리를 다 마쳤다고 생각한 것인지, 비제-르브룅은 1842년 3월30일 오후 5시, 편안한 상태로 숨을 거뒀다. 88세의 나이였다. 유언에 따라 그녀는 자신의 삶을 상징하는 ‘팔레트와 붓’을 새긴 묘지 아래 묻혔다. 월계관과 작은 메달로 장식한 비석에는 생전 스스로 지었던 비명(碑銘)을 새기도록 했다.

“여기 마침내 쉴 곳을 찾았네(Ici, enfin, je repose).”

혁명의 불꽃으로부터 달아나 세계를 떠돌아야 했던 한 왕당파의 마지막 말다운 비명이었다.

<검은 미술관>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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