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사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초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자 단결권은 결사의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회고하면 결사의 자유를 ‘복수’노조(multiple unionism)로 좁게 이해하고 행동한 측면이 크다. 물론 한국 노동조합을 지배한 기업별노조주의 체제와 맞물리면서 현실에서 결사의 자유는 복수노조로 대체됐고, 이는 오늘에 이르러 오히려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위축시키는 역작용을 가하고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은 1987년 이후 터져 나온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그 당시에는 올바른 주장이 30년이 흐른 오늘에 와선 부당한 주장일 수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노동운동이 시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30년 전에는 옳았던 투쟁의 결과가 30년이 흐른 지금엔 노동운동의 발목을 낚아채는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30년 전엔 결사의 자유와 복수노조가 내용적으로 같은 말이었다면, 지금은 결사의 자유와 복수노조는 내용적으로 전혀 다른 말이 됐다. 당시엔 복수노조가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증진시켰다면, 지금에 와선 복수노조가 노동 3권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복수노조가 노동자들에게 ‘결사의 자유’가 아니라 ‘경쟁의 자유’ 혹은 ‘분열의 자유’를 촉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결사의 자유를 복수노조로 잘못 이해하고, 국가와 자본이 이를 조장하는 문제는 아시아에서 이제 보편적인 문제가 됐다. 복수노조로 변질된 결사의 자유는 기업별노조 체계와 맞물리면서 노동조합의 의미 있는 발전을 저해하고 정상적인 노사관계의 형성을 가로막고 있다. 캄보디아는 제87호 결사의 자유 협약을 비롯해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8개를 모두 비준했다. ‘더 크고 더 강한 노동자 조직’을 만들어야 할 결사의 자유는 기업별노조 난립을 초래했다. 그 결과 한 공장 안에 많게는 9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생겨났고, 이들을 관리하는 연맹도 9개나 생겨났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도 ILO 기본협약 8개를 모두 비준한 나라다. 캄보디아만큼은 아니지만 복수노조 문제가 노동운동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물론 ILO 협약 제87호를 비준하지 않은 나라에서도 복수노조는 노동기본권을 증진하는 역할보다 노동조합 간 분열과 경쟁을 부추김으로써 사업장 안에서 노동조합의 힘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오히려 노동자에 대한 사용자의 통제권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태국·필리핀·인도가 대표적인 나라들이다.

이젠 한국에서도 이런 사례는 늘어나는 추세다. 복수노조를 허용해 보다 강하고 튼튼한 노동자 조직의 결성을 보장한다는, 결사의 자유의 근본 취지를 훼손하는 역설은 기업별노조주의가 지배적인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베트남은 노동자 조직의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조건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서명할 수 있었다. 이로써 공산당이 통제하는 베트남노동총연맹(VGCL) 산하 노조들의 독점권이 약화되고 노동법 개정을 통해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가 수년 안에 허용될 것으로 보인다. 2020년 전후로는 VGCL 이외 상급단체도 허용함으로써 실질적인 노조 경쟁체제를 도입할 계획이다. VGCL 산하 지역별 노동연맹이 기업별노조를 통제하고, 산별단위 노조조직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베트남 상황에서 복수노조 허용은 제2의 캄보디아나 태국 사태, 즉 단위노조의 난립과 무능한 상급단체들의 비효율적인 경쟁을 낳을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의 의도는 ‘결사의 자유’를 통해 베트남 노동운동을 더 크고 강하게 발전시키는 데 있지 않다. 복수노조 도입을 통해 VGCL 독점체제를 약화시키고, 나아가 노동자 조직 사이에 ‘경쟁의 자유’를 조장함으로써 중앙으로 집중된 현재의 노동운동 조직과 노정관계를 해체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산별노조운동의 전망과 전략이 부재한 가운데 ‘결사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횡행하는 파편화되고 분열된 기업별노조주의로 인해 사업장 안팎에서 노동자 권리를 증진하고 이익을 개선하려는 아시아 노동조합운동이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산별연맹을 비롯한 상급단체들은 정책 미비와 인력·자원 부족으로 초기업별 단체교섭 강화와 국가정책 개입이라는 자기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큰 틀에서 보면 한국 노동운동도 예외는 아니다. 복수노조 경험처럼 산별노조운동의 전망과 전략도 30년 전과 동일할 순 없을 것이다. 시대가 바뀐 만큼 그 내용과 형식도 변화되고 변경될 수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기업별노조운동에서 산업별노조운동으로 조직구조를 변경해 온 경험과 변경할 수 있는 동력을 가진 나라는 드물다. 한국은 그 드문 나라에 속한다. 올바른 산별노조 전략을 어떻게 수립할지, 나아가 ‘복수노조’라는 낡은 틀을 진정한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확보로 어떻게 전환시킬지에 대한 한국 노동운동의 경험은 아시아 노동운동의 발전에 중요한 디딤돌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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