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선진국이란 다름이 아니라 국민이 부강한(부유하고 힘이 있는) 나라를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성숙 모두가 함께 이룬 나라다. 1960년대와 비교해 봤을 때 분명 우리는 두 측면 모두에서 선진국에 훨씬 근접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스스로 선진국이라고 제대로 자인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가장 큰 걸림돌은 아마도 ‘노동’이 아닌가 싶다.

98년 외환위기의 쓰라린 고초를 겪은 이후 근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우리 경제 전반은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다시 동아시아의 발전한 산업국가 위상을 회복했다. 허나 우리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하다.

생산, 교역, 매출, 회전하는 자본량의 규모는 커졌을지 몰라도 국민 대다수는 부강해지지 못했다. 대부분 가계부채를 상당히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소소한 일자리 하나를 놓고도 절박하게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야 한다. 웬만한 공공기관 행정원 자리 하나를 놓고도 수천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한다. 소득액과 무관하게 지속가능한 고용이 보장되는 곳이기라도 한다면 금상첨화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 즉 사적 소유가 철폐되고 사회가 생산 전반을 통제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수양할 수가 있다. 그리고 사회가 생산 전반을 통제하게 되므로 각 개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 일을, 내일은 저 일을, 즉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몰며, 저녁식사 후에는 비평을 하면서, 그러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평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필자는 이러한 이상사회의 도래가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지만,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국민이 부강한 사회’라면 이러한 이상사회의 모습에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더 가까이 접근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독일 같은 나라에서 살아 보면 국민이 3~4주의 휴가를 보장받고 칼퇴근이 기본이며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서 단적으로 우리와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

마르크스가 말한 이상사회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중요한 전제가 있다. 하나는 생산력(성)이 고도로 발전돼야 하며, 다른 하나는 노동시간이 대폭 줄어들어야 한다. 이상사회까지는 아니어도 서두에서 언급한 선진국이라면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상당히 실현돼 있는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생산성을 높이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일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정부가 그러한 시각을 갖고 정책을 펴야 하고, 산업계·경제계가 그것에 호응해야 하며, 노동계도 그것을 지향하며 요구하고 협조해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산업계는 비용절감에 목숨을 걸며 바닥을 향한 경쟁을 불사한다. 정부는 그러한 흐름에 강하게 제동을 걸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들이 만연해 있다. 과연 노동개혁의 상은 제대로 잡혀 있는 건지.

종합해 보자. 선진국은 국민이 경제활동에 투입한 노동시간의 단가, 즉 단위노동시간의 가치가 높게 매겨지며, 국민이 길게 노동하지 않아도 안정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 선진국이라고 하기에 자신이 없다. 노동하는 국민의 처지를 중심에 두고 고려하면서 선진국 진입을 향한 정책을 마련하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택하는 저임금·불안정 확산은 결코 답이 아니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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