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선금 원풍동지회 회장(사진 왼쪽)이 박순희 민주노총 지도위원(가운데, 당시 부지부장), 김금자 원풍동지회 총무와 함께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 삼호연립 사무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30년이 넘은 주택 담벼락엔 담쟁이덩굴이 무성했다. 정기훈 기자

“갑자기 웬 사진을 찍겠다고…. 신문에 나가는 건가? 그럼 박근혜보다 이쁘게 찍어 줘요.”

“우린 이때까지 살면서 보톡스 한 번 안 맞았잖아. 그래도 우리가 낫지 않나? 호호호.”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 삼호연립 101호 앞마당. 지어진 지 30년도 더 된 낡은 빌라 담벼락에 물기를 머금은 담쟁이넝쿨이 초록의 싱그러움을 뿜어낸다. 봄이다. 봄비를 맞아 말갛게 피어난 꽃송이였을 ‘여공’들은 예순을 넘어 일흔을 바라보는 ‘여사님’이 됐다. “사진은 무슨 사진이냐”며 몇 차례 손사래를 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포즈가 나온다. 왕년에 단체사진 좀 찍어 본 솜씨다. 함박꽃 세 송이가 흐드러졌다.

“커피 마실래요, 녹차 마실래요?”

“커피요.”

“오케이. 다방커피 괜찮죠?”

디자인이 족히 10년은 넘었겠다 싶은, 유려한 곡선의 손잡이가 달린 꽃무늬 커피잔에 연갈색 다방커피가 찰랑거린다. 잔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아니, 아니. 손님은 컵받침이 있어야지. 잠깐만, 잠깐만요.”

굳이 컵받침까지는…. 과분함과 분주함이 교차하는 대접을 받으며 인터뷰가 시작됐다. 강력한 포스를 풍기는 세 여인이 테이블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박순희(69) 민주노총 지도위원(옛 섬유노조 원풍모방지부 부지부장)과 황선금(61) 원풍동지회 회장·김금자(60) 원풍동지회 총무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1일 오후 ‘원풍의 집’을 찾았다. 이날 인터뷰는 황선금 회장과의 질의응답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중간중간 박순희 지도위원과 김금자 총무가 말을 보탰다.

빨갱이로 몰려 천지사방으로 쫓겨난 지 34년

서울 영등포역에서 신길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어 우신초등학교 사거리에 닿으면 원풍의 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사거리 오른쪽 모퉁이 돌계단을 밟고 축대에 오르면 허름한 빌라 한 동이 눈에 띈다. 이 빌라가 원풍의 집으로 불리는 이유는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주름잡았던 섬유노조 원풍모방지부(이하 원풍노조)가 82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로 해산된 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조합비로 구입한 집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낡아서 재개발 얘기가 나오는데요. 그때만 해도 이 일대에서 제일 좋은 건물이었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에 5층짜리 빌라가 떡하니 서 있으니 빌딩처럼 보였죠. 오갈 데 없는 해고자나 노동운동가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어요. 고인이 된 문익환 목사님이나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이해찬 의원, 수배 중이던 단병호 전 전노협 위원장 등 기라성 같은 운동권 인사들이 이곳을 아지트로 썼어요.”

원풍노조는 여성노동자가 중심이 된 70년대 노동운동사에서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어용 집행부를 몰아내고 가장 먼저 노조 민주화를 이룬 데다, 강철 같은 조직력을 자랑했다. 유신독재가 몰락한 뒤 권력을 꿰찬 신군부가 민주노조를 차례로 무너뜨릴 때에도 마지막까지 버텼다.

82년 9월27일 정권의 사주를 받은 구사대와 사복경찰은 노조 사무실을 강제로 폐쇄하고, 노조 지부장을 자루에 담아 화곡동 쓰레기장에 내다 버렸다. 공장 안에서 농성을 벌이던 조합원들은 머리가 깨지고 입술이 터지고 옷이 찢긴 채 교통이 차단된 대림동 6차선 도로에 내동댕이쳐졌다.

“조합원들은 빨갱이로 내몰려 천지사방으로 쫓겨났어요. 9·27 사건을 계기로 노조 핵심간부 8명이 구속되고, 조합원 559명이 해고됐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해고자들이 현장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전국 사업장에 재취업 금지 블랙리스트를 돌렸어요. 우리는 법외노조로 활동하면서 복직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원풍노조 조합원들은 정권에 의해 노조가 처참하게 부서진 뒤에도 가족 같은 유대감을 형성하며 끈질기게 원상회복 투쟁을 전개했다. 마침내 김대중 정부 시절 제정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민주화보상법)에 따라 2000년 조합원 157명의 명예가 공식적으로 회복됐다. 2010년에는 원풍노조가 국가폭력으로 파괴됐다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심의결정을 이끌어 냈다.

공장 취직해 동생들 대학 보내겠다던 소녀는

원풍노조 조합원들은 9·27 사건 이후 34년이 지난 지금도 끈끈한 동지애를 과시하고 있다. 원풍동지회를 결성해 매년 정기총회를 갖고, 꾸준히 사회봉사활동을 다닌다. 날씨가 화창한 계절엔 야유회도 떠난다. 동지회 회원은 150명에 육박한다. 동지회는 최근 조합원 7명의 구술 생애사를 담은 <공장이 내게 말한 것들>(실천문학사·1만2천원)을 펴냈다. 황선금 회장이 글을 썼다.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책이나 논문이 많은데요. 내용을 보면 당시 노조들이 임금인상에 매몰됐거나, 자기 조직만 끼고돌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각개격파 당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시간만 나면 노동시국사건 재판을 공청하고, 기독교회관 집회에 참석하고, YWCA 위장결혼식 사건도 함께 겪었어요. 주변 노동자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진 노동자’를 통해 혁명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현장에 들어온 학생 출신 취업자들은 우리들의 연대투쟁을 폄하하고, 경제주의자·조합주의자라고 손가락질했어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학생운동가들은 당시 활동을 경력 삼아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70년대 노동운동을 “경제투쟁에 머문 실패한 운동”으로 규정한 당사자들이다. 노동운동 내부 분열과 갈등의 씨앗은 이렇게 뿌려졌다.

원풍동지회가 펴낸 <공장이 내게 말한 것들>은 70년대 노조활동을 했던 노동자가 직접 쓴 노동운동사라는 점에서 기존 책들과 구분된다. 투박하지만 진솔하다. 책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비슷한 사연을 안고 있다. 가난한 시골집에서 태어나 중졸 이하 학력으로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다. 오빠 또는 남동생 학비를 벌기 위해서다.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 글짓기 시간에 이런 글을 써낸 기억이 나네요. ‘빨리 학교를 졸업해 서울 공장에 취직해서 국산품을 만들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남동생들을 대학까지 가르치겠다.’ 서울로 올라와 식모살이를 하다 대한모방을 거쳐 75년 원풍에 입사했어요. ‘에델바이스’라는 노조 소모임에 가입해 동료들과 취미활동을 하고 역사와 노동법도 배웠습니다.”

정기훈 기자

노동조합은 무엇인가, 무엇을 해야 하나

30년도 더 된 이야기라서 그럴까. 책을 읽으면서 납득하기 어려웠던 대목은, 책에 등장하는 조합원 모두 그 엄혹한 시절을 “가장 행복했다”고 추억한다는 점이다. 대체 노동조합이 뭐기에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지금까지 마음속 보석상자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그때는 노조교육이 굉장히 활발했어요. 강사로 온 신인령(전 이화여대 총장) 선생님으로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강의를 듣고 큰 감화를 받았습니다. 국산품을 만들어 동생들을 가르치겠다던 치기 어린 소녀가 노조를 통해 의식화된 거죠. 우리 집이 가난하고 아버지가 무능력한 것이 사회구조적 문제였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 거예요. 이름도 없이 공순이로 불렸던 우리들에게 노조는 인격을 부여하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힘을 보탤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줬어요. 생각해 보세요. 살면서 처음 느끼는 자존감과 긍지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시절을 잊을 수 있겠어요.”

30년 전 원풍노조를 지탱한 기본은 조합원 교육과 토론, 실천활동이었다. 원풍노조의 경험은 일상활동이 빈약해지고, 집행간부 관료화와 정파갈등이 심해지고 있는 현재의 노조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노조의 일상활동이 약화될 때 그 노조는 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에서 동떨어진 ‘자판기 노조’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다. 임금인상률에 집착하는 협상용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어쩌랴. 위원장 선거철에만 반짝, 관철하지도 못할 구호를 남발하는 오늘날 노조들의 행태는 정치권의 구태를 닮았다.

“공장 내 차별을 없애는 것이 원풍노조 활동의 핵심이었어요. 회사 관리자들에게 잘 보인 사람이 조장이 되고 반장이 되는 관행을 없애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사용자들이 조장하는 경쟁논리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입사 순서대로 조·반장이 되도록 작업장 규율을 바꿔 갔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한 사람의 백 걸음보다 백 사람의 한 걸음이 소중하니까요.”

비정규직이 된 여공들 “차별받지 않을 권리 있다”

원풍노조는 작업장 내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현장 실천활동을 병행했다. 예를 들면 ‘월급봉투 보여 주기 운동’ 같은 것이다.

“당시 노동자들은 자기 월급봉투를 다른 사람에게 잘 안 보여 줬어요. 관리자들이 ‘너한테만 더 주는 거니까 남들한텐 얘기하지 말라’며 몇몇 직원에게 웃돈을 주고 있었거든요. 노동자들 사이에 벽이 생긴 거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노조 소모임을 통해 월급봉투 보여 주기 운동을 시작했어요. 생리수당이 제대로 나왔는지, 연월차 수당이 빠지지는 않았는지 서로서로 비교하도록 했죠. 그런 뒤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조합원들을 데리고 노무과로 쳐들어갔습니다. ‘노무과에 월급봉투 따지러 가기 운동’을 한 셈이죠.”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이런 활동은 공장을 서서히 변화시켰다. 따로 운영되던 공원용 식당과 사원용 식당이 통합되고, 공원과 사원의 작업복 색깔도 통일됐다.

“너무너무 신이 났어요. 월급 받아 고향집에 보내고 나면 '보름달빵' 하나 사 먹는 게 부담일 정도로 가난은 계속됐지만, 노조는 패배하는 법이 없었거든요. 내가 노조를 통해 무언가 하고 있고,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어요. 점점 노조 힘이 세지니까 회사측이 어용 교수들을 불러다 종업원 교육을 했어요. 그 내용이 황당하더라고요. 공순이 티 내지 말고 비싼 옷 맞춰 입어라, 그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어요. 조합원들은 강의 내내 모나미볼펜 꼭지를 ‘딸깍딸깍’ 누르며 항의했어요.”

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노동환경도 변해 갔다. 가장 큰 변화는 비정규직 증가다. 노동자 간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50·60대가 된 원풍노조 조합원 대다수도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꾸려 간다. ‘비정규직=최저임금’은 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룰이다. 가난은 계속되고 있다.

두 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이날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표현은 ‘인간 사랑’과 ‘사람 존중’이었다. 운동의 지표를 잃고 방황하는 후배들에게 민주노조운동 1세대가 들려주고 싶었던 메시지다.

“책 제목을 정할 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공장이 내게 말한 것들>이라고 정한 것은 노조를 통해 배운 인간 존중의 사상, 누구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깨우침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해고된 뒤 전기검침원이나 파출부 같은 비정규직으로 먹고살았는데요. 대공장노조 단체협약에 자녀 우선채용 조항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화가 났어요. 해당 조항이 실효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조가 차별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죠. 누가 뭐래도 조직된 노동자는 달라야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밥이라도 먹고 가라”며 잡는다. 영등포역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추어탕 네 그릇과 튀김 한 접시, 소주 두 병이 놓인 풍요로운 밥상이 펼쳐졌다. 여자 넷이 모였으니 수다가 무르익고, 힘들었던 시절 생각에 눈가가 젖는다. 그래도 이들 곁엔 30년 넘는 세월의 풍파를 함께 건넌 동지들이 남아 있질 않나. 외로움 없는 노년은 노조활동이 준 보너스다.

“근처 올 일 있으면 연락해요. 우리가 밥은 사 줄 수 있어.”

가난했지만 가난하지 않았던 우리네 이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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