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실하다고 소문난 원청사도 뒤로 나자빠지는데, 하도급업체라고 별 수 있나요? 하도급업체에 대금을 지급했는데 부도나고 잠적해 버리면 우리 같은 노동자들은 누가 책임질 겁니까?"

21일 건설노조 확대간부 결의대회가 열린 서울역광장에서 만난 양평순 노조 충남건설기계지부 사무국장은 깊게 팬 주름만큼이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건설업계를 뒤흔들고 있는 하도급대금 직불제 때문이다.

하도급대금 직불제는 발주자가 하도급자에게 공사대금을 직접 지급하는 제도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올해 16조원에 달하는 공공발주공사에 하도급대금 직불제를 시행하겠다고 하면서 사달이 났다.

공정거래위는 하도급대금 미지급 문제에서 하도급업체를 보호하겠다며 해당 제도를 도입했다. 취지는 좋다. 그간 하도급업체들이 원청의 대금 미지급과 지연지급, 어음·대물변제 지급 같은 '갑질'로 피해를 봤으니까.

하지만 공정거래위는 '을'만 보고 을 밑의 '병'은 보지 않는 것 같다. 건설협회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4년까지 건설기계대여대금 체납액 261억원 가운데 87%가 하도급자 체불로 발생했다. 건설노동자 임금체불액도 같은 기간 1천463억원에서 3천30억원으로 두 배 이상 급증했다. 건설노조가 올해 설 명절을 맞아 조사한 악성체불 23건 중 19건이 하도급업체에서 일어났다.

떼인 돈을 받으러 하청업체 사장을 쫓아가 봐도 열에 아홉은 잠적해 버리는 탓에 만날 수조차 없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또 다른 노동자는 "돈 떼먹고 도망간 사장을 몇 년 만에 만났더니 '미안해. 벌어서 줄게' 하면서 오리발 내밀더라"며 뒷목을 잡았다.

3년 전 건설현장 체불방지를 위해 '건설기계대여대금 지급보증제'가 도입됐다. 건설기계 대여계약을 맺는 건설사가 임대료 체불시 지급보증기관이 대신 체불금을 주는 제도다. 하지만 하청업체에서 지급보증서를 발급받은 건설기계 노동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지난해 건설노조가 건설기계 조합원들을 조사했더니 "지급보증서를 발급받은 적이 없다"는 응답이 78.3%(384명 중 264명)나 됐다. 노동자들이 하청업체에 지급보증서 발급을 요구하면 "너 말고도 일할 사람 많다"며 계약을 안 한다고 한다.

대다수 하청건설사들이 법을 안 지키면서 체불을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시행되는 하도급대금 직불제는 하도급 말단에 서 있는 건설노동자들에게 벼랑 아래로 떨어지라며 등을 떠미는 제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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