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50년 성직자의 삶을 생명평화를 위해 살아온 사람.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 피눈물로 고통을 호소하는 노동자·민중과 함께 싸운 사제.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납치·연행·순례·농성·단식으로 맞서며 온갖 사고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으며 고난의 길을 걸었던 사도. 지난달 24일 사제 서품 50주년을 맞은 문정현 신부.

기나긴 형극의 가시밭길을 달려온 그의 인사는 오늘도 변함이 없다. “평화를 빕니다.”

문정현은 일제 강점기인 1940년 출생했다. 66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미국 메리놀신학대 유학기간을 빼고는 줄곧 길 위의 신부로 살았다. 74년부터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을 시작했다. 75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 사형집행을 저지하다가 무릎 부상으로 5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인 76년에는 '3ㆍ1 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됐다. 79년에는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됐다. 87년 익산 창인동 성당 주임신부 시절부터 노동자 투쟁에 헌신했다. 99년까지 노동운동 현장 활동을 지원했고, 전북 지역에서는 '노동자의 아버지'로 불리며 민주노총 전북본부 고문을 맡기도 했다.

90년대 이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재개정 투쟁을 펼쳤다. 99년부터 '불평등한 SOFA 개정 국민행동' 상임대표를 역임했다. 2000년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를 위한 대책위 상임공동대표, 2003년 이라크 파병 반대활동, 2005~2006년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 활동, 2009년 용산참사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 추모미사 집례,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와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투쟁까지 이 땅의 생명평화를 위한 저항운동은 끝이 없었다.

심지어 2011년 7월6일 제주도 강정마을로 이사를 해서 강우일 주교가 선물한 빨간색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현장투쟁을 하는 지역주민이 됐다. 구럼비를 지키고 강정마을 평화를 위해 테트라포트 아래로 떨어져 중상을 입기도 했지만 공권력에 온몸을 던지는 저항과 평화 기원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필자는 2002년 명동성당에서 문정현·문규현 신부와 인연의 싹을 틔웠다. 당시 전력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파업농성장에 전기가 공급이 안 되는 황당한 상황이 지속됐다. 발전기 보급은 경찰 방해로 번번이 실패했다. 마침내 작전을 성공시켰으니 문정현·문규현 형제신부가 그 주인공이다.

“전력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촛불 켜고 버티는 것이 말이나 돼? 그것도 명동성당에서 말이야. 내가 어떻게 해서든 수를 내야지.”

몰래 반입한 발전기가 정상작동이 되고 명동성당 천막에 전기가 공급됐을 때 문정현 신부의 그 환한 표정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문정현 신부를 만나 그때의 추억담을 나누면 아무리 반복해도 통쾌하기 그지없다. 대한문에서 쌍용자동차·강정마을·용산참사 농성장이 만들어졌을 때 등 모처럼 한 번씩 뵈면 변함없이 감사한 마음에 그때의 짜릿함이 화제에 오른다.

2012년 길 위의 사제 문정현 신부는 억압받고 소외된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나누고 민주주의와 인권, 생명과 평화를 위해 노력한 점을 평가받아 광주인권상을 수상했다.

문정현 신부는 수상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광주항쟁 정신을 주먹밥이라 생각합니다. 주먹밥은 평범한 사람들이 더 이상 현실의 불의를 보고 참을 수 없어 자발적으로 나선 시민행동이었습니다. 오늘도 그 정신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용산참사와 한진중공업·쌍용차 해고노동자, 4대강, 강정에서도 이름 없는 사람들의 주먹밥이 힘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난한 이들의 자발적인 연대가 밑바탕이 돼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가 지켜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문정현 신부. 이 시대 고난받는 이들을 위해 변함없이 광야에서 외치는 사도, 평화를 향한 저항을 멈추지 않는 50년 사제의 길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신의 부름과 민중의 통곡을 실천적 사명으로 받아안고 가는 그의 길에 신의 은총이 항상 함께하길 기원한다. 아울러 노동자·민중의 따뜻한 감사와 박수가 늘 함께하시길.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hdlee20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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